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 중심의 서구 사회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 대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 암시했다. 2001년 9·11테러,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이를 확증해 준 축소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종교 단체 간 대결, 신학적 대결, 영적 현상 및 회심 대결 등에서 양 종교는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테러와 대 테러 전, 종교 박해와 같은 형태로도 대결은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은 어떤 종교인가?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일보에서는 김덕래, 초미성 선교사의 글을 통해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간다.


▲초미성, 김덕래 선교사(왼쪽부터)
(선지자)무하멧(무함마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슬람의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가?

이슬람퍼스펙티브 세미나를 할 때마다 질의응답 시간을 갖게 된다. 세미나 목적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참가자들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 것에 둔다. 지식을 전달하기 위함이라면 이런 세미나가 아니어도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서적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으로 품어야 할 무슬림은 누구인가를 알고자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세미나 기간 중 가장 먼저 받는 질문이 “이슬람의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가요?”이다. 서로 유일신을 믿고 있으며 그 뿌리를 구약의 아브라함에 두고 있다 하니 궁금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 자신도 신학교 비교종교학 시간에 교수에게 물은 질문이기도 하다.

1. 언어학적
아랍어의 '알라'는 단순히 유일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더도 덜도 없는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영어에서의 God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이 단어의 어원이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인지 질문해 볼 수도 있다. 이슬람이 생기기 전 '알라'는 달을 섬기는 이방신의 이름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물론 구약의 엘로힘의 어원과 같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그 어원이 어디에 있음은 그리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아랍어 성경이 번역될 때 우리의 하나님을 '알라'로 표기하기로 하였고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아랍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을 '알라'라 부르고 있다.

2. 신학적
같은 언어로 된 '알라'여도 무슬림과 그리스도인들의 이해는 완전히 다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즉 신관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서로의 생각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너무도 다르기에 우리는 복음을 제시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일으키게 된다.

3. 알라는 누구인가?
'알라'가 누구인지 이 짧은 칼럼에 다 옮길 수는 없다. 무슬림이 알고 있는 '알라', 기독교의 하나님과 결코 같을 수 없는 그 '알라'에 대해 중요한 몇 가지만 나누고자 한다.

1) 완전한 오직 한 존재로의 알라'
알라는 완전하게 홀로 존재한다. 무슬림들의 신앙고백인 샤하다(Shahada)에서도 명백히 표현된다. “알라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하멭은 그의 선지자이다.” 알라만이 이 땅의 창조주요, 이 땅을 지배하는 신이라는 뜻이다. 즉 알라외에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모든 무슬림을 하나로 만드는 정신적 지주가 되는 사상이다.

무슬림들은 세상에서 자신들만 유일하게 “유일신론자 혹은 유일교 신자” 라 주장한다. 이 유일신 사상은 모든 무슬림들에게 무의식 깊은 곳까지 자리잡고 있으며 그들의 예술, 건축등에서도 그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알라에게는 파트너도 동격자도 없다. 그저 한 분으로 혼자 존재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무슬림들이 가장 역겨워하는 것으로 이를 삼갈 것을 꾸란에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 이슬람에서 가장 큰 죄는 아랍어로 'shirk'이라 한다. 일종의 신성모독 죄 같은 것으로 어떤 우상 혹 인간이나 사물을 알라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여김이 무슬림들에게는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개념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알라와 연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함은 더욱 더 큰 오해를 부른다. 거룩하고 신성하신 알라는 결코 어떤 인간과도 연합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란 결코 용납되지 않는 유일신 모독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외쳐도 그 소리는 허공에 있을 뿐 오히려 진지한 무슬림들에게는 분노만을 일으키게 할 뿐이다.

2) 이해될 수 없는 '알라'
'알라'는 무소부재 하다. 모든 곳에 '알라'는 존재한다. 그러나 창조물과는 완전 분리되어 있다. 그는 우주를 창조하였고 질서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알라'는 인간에게는 완전히 알 수 없는(unknowable) 존재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도 가까이 할 수도 없는 다른 세계의 또 다른 존재인 것이다.

무슬림들이 “알라는 자비로우시다”라고 표현함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 그 자비는 우리의 이해와 완전 다른 것이다. 이슬람 신학자 Ibn-Hazm은 이렇게 말한다. 꾸란에서 말하는 자비로운 '알라'는 우리의 이해와는 거리가 있다. 자비로운 알라는 그의 창조물을 아프게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슬픔을 허락하니 결코 자비의 알라가 아닌 것이다. 자비는 알라의 한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이를 우리가 알고 있는 차원으로 이해하지 않고 꾸란에 적힌대로 그저 사용할 뿐이다. 꾸란이 생긴 시대에 자비라는 단어는 아마 현재의 우리가 알 수 없는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꾸란의 말씀이 변할 수 없으니 우리는 꾸란에 적힌대로 사용할 뿐이다.

3)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알라'
알라는 인간의 사랑을 필요하지도 구하지도 않는 존재이다. 파키스탄 무슬림 여인의 개종 간증집인 “나는 그를 감히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 를 기억한다. 무슬림들에게 있어 알라를 아버지라 부름은 불경죄이다. 그 누구도 알라를 그렇게 호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하멭도 자신이 알라의 뜻을 계시함이라 하였지 알라를 계시한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알라는 저 멀리 거룩한, 인간과 다른 차원에 존재하기에 결코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본질로 아버지라는 표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혹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이다.

4) 변할 수 없는 '알라'의 뜻 : 숙명
알라는 모든 것을 예정하고 있어 인간의 어떤 뜻도 반영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도 예정론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망가뜨리지 않으며 표현된다. 그러나 이슬람에서의 예정론은 인간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즉 운명, 숙명의 개념이 무슬림 신학에 깊이 자리잡고 있고 이는 알라의 뜻에 조건없이 완전히 항복함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알라의 뜻에 달려 있으니 인간의 그 어떤 뜻도 쓸데 없으며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알라의 뜻은 강하다. 어떤 인간도 그의 뜻을 바꿀 수 없다. 알라의 행위는 매우 독단적이다. 그의 뜻은 한마디로 '파워'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심판의 날에, 만일 알라의 뜻이라면 인간이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알라에게는 의인을 구원할 혹은 악인을 저주할 필요나 의무가 있지 않다. 속된 표현으로 모든 것이 다 '알라'의 마음대로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 속성이, 성품이 '사랑'이란 단어로 총체적으로 표현함에 이슬람의 알라는 '권능'이다. 알라는 모든 인간을 그의 힘으로 지배하며 인간의 의무는 알라의 뜻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다.

사막에 피어 오르는 사랑
1986년 파키스탄에 처음 도착했을 때 첫 인상은 흐릿한 삭막함이었다. 사막이라기 보다는 광야에 가까운 땅에 비가 오지 않으니 나무가 많지 않았다. 어쩌다 보이는 나무는 먼지에 싸여 초록과는 거리가 먼 회색 같은 것 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온화함과 따스함 보다는 거칠고 메마름에 가까웠던 것 같다. 마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들 처럼.

회색이 매우 자연스러워질 때가 되니 현지인 친구들이 제법 생겼다. 당시 내 룸메이트와 팀이 되어 가가호호 방문을 많이 하였다.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즉시 창세기 부터 요한 계시록을 통해복음을 제시하곤 했다. 나는 평소 한 사람을 사람으로 알아갈때야 비로소 전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에 나는 그저 아무 말 않고 그의 전도가 끝나면 곧 집에 오곤 했다. 당시 모든 것이 부족한 나였지만 한가지 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내 룸메이트와 다녀온 그 집에는 다시는 갈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없음에 늘 아쉬워 했고 내 파트너는 복음이 전달된것에 만족하였다. 복음을 전했으니 믿는 것은 듣는 사람의 몫이었다고 믿었기에…

시간이 흘러 무슬림이 누구인지 조금 알 무렵, 그들에게는 내 가슴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이 애틋한 사랑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사랑의 고백을 간증으로 들려 줄 때마다 그들은 부러움에 찬 그러면서도 알 수 없다는 듯한 묘한 표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운운할 때도 그들은 잠잠히 듣는 매너를 보여 주었다. 이제보니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불경시하는 개념임을 알면서도 내가 친구기에 웃으며 들었던 것이다.

그들과 나눈 시간들을 통해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나는 복음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였을까? 내가 만난 무슬림들은 경건하고 진지하였다. 율법적인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고 선을 베풀고자 늘 애썼다. 그럼에도 그 삶에 자리한 커다란 두려움을 볼 수 있었다. 내 일에 대한, 삶의 끝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더 경건하고 율법적인 무슬림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알라와 사랑은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알라의 뜻에 기계처럼 움직여져야 하며,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부단하게 애쓰며 노력해야하는 무슬림들의 삶은 참으로 고달프게 보였다. 그 많은 행위 속에서도 미래가, 구원이 보장되지 않으니 더 많은 율법을 지킬수 밖에 없는 굴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우리의 복음보다는 율법을 통해 알라를 기쁘게 하여 구원을 요행해보는 것이 인간에게는 더 쉬운 것일까? 그러기에 16억이라는 무슬림이 인종과 언어를 넘어 이슬람이라는 한 울타리에서 알라의 뜻을 이루어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선악과를 따 먹고 죄지은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시며 우리를 찾아 오신 하나님. 기쁘게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신 하나님. 죄의 삯이 사망이기에 죄없는 당신이 친히 우리에게 오셔 우리의 모습을 하고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 가장 거룩하시면서 가장 추한 인간을 이해하시며 불쌍히 여기시며 포기하지 않으시는 창조자 하나님. 그분이 이제 우리를 통해 무슬림들에게 다가가신다. 사막에 그를 향한 사랑이 피어 오르기를 간절히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