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란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6월 12일에 치러진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껍데기만 보고 판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란 대통령에 아마디네자드가 재선되거나 무사비로 바뀌거나 상황에는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란에서 대통령의 역할은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Khamenei)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이래로 가장 온건한 대통령이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하타미 정권이 8년 간 통치했을 때에도 이란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란 사람들은 그렇게 열광적으로 거리로 뛰쳐나와 근 3주 동안이나 목이 터지게 외치고 있을까.
이란의 찬란했던 과거
이란은 한 때 세계를 정복했던 나라다. BC 6세기 이란의 조상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은 세계 최강의 나라를 세웠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장 완벽한 인권선언을 했던 사람이다. 이란의 문명은 아랍 문명과는 차원이 달랐다. 쉬라즈라는 도시에 가보면 이란의 유명한 시인 하페즈나 싸아디의 묘지를 잘 꾸며놓아서 지금도 관광객들이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꼭 들르려 하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하마단에 가보면 부알리 씨나의 박물관이 있다. 그는 수학, 지리학, 논리학, 철학, 화학, 천문학, 문리학, 심리학 등 모든 분야에 뛰어난 학자였으며 그의 작품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이 있다. 하마단에 있는 최상의 것들은 식당이든 호텔이든 대학이든 모두 그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또한 이란의 자랑거리인 석조 문화를 보면 이미 BC 5세기부터 엄청난 석조 건축이 발달하였다. 세계 문화재로 지정된 쉬라즈의 페르세 폴리스(Parse Polis)는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의 웅장함과 로마의 석조 문화의 정교함을 합쳐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란의 석조 기술이 로마로 건너가서 체온이 느껴질 정도의 질감을 표현하는 찬란한 로마의 석조 문화가 꽃피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수준 높은 이란의 문화 덕분에 아랍의 이슬람 문화가 덩달아 격상된 것이다.
페르시아의 자존심은 고고한 것이어서 이들이 비록 이슬람은 받아들였으나 이집트처럼 언어를 아랍어로 바꾸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슬람 국가지만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란의 문화가 아랍의 문화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라는 것을 지금도 의연하게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난 지금은 이슬람 율법으로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원리주의 무슬림들이 이란을 통치하고 있다.
이슬람 혁명이 가져온 큰 변화
이슬람 혁명은 이란 사람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저 단순히 팔레비 왕조가 물러가고 호메이니(호메이니가 죽은 후 하메네이가 종교지도자 지위 승계)가 들어와서 이슬람의 샤리아 법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차원이 아니다.
하늘과 땅 차이로 변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첫째는 경제가 곤두박질했다는 것이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때만 하더라도 이란의 경제는 중동의 최고였다. 그 때의 환율은 미화 1불 당 70리알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미화 1불 당 9500리알 정도나 된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예를 들어보자면 1994년에 한국에서 조립한 프라이드(Pride) 베타 차량을 새 차로 뽑을 때 4800만 리알을 지불했었다. 그리고 그 차를 10년 간 타다가 2004년에 중고품으로 다시 팔았는데 놀랍게도 그 판매가격은 5000만 리알이었다.
두 번째 이슬람 혁명이 가져온 국민들이 느끼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이슬람 율법의 강요다. 이전에 왕이 다스릴 때는 여성들의 복장은 유럽 복장과 마찬가지였다. 당시엔 아무도 복장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의 모든 여성들은 외국인도 예외 없이 12세 이상이면 무조건 베일을 착용해야 한다. 라마단 달에 한 달 간 해야 하는 이슬람의 금식도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다. 이 기간엔 해가 있는 동안에는 물도 마실 수 없을 뿐 아니라 껌도 씹으면 안 되며 심지어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까지도 잡아간다.
유럽식 자유를 누리던 사람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에 7세기에 아랍 사람들의 문화를 강요 받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러나 반항의 대가로 엄청난 징계가 따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했다. 오늘날 경제가 곤두박질하도록 만든 장본인들이 이슬람 율법을 강요한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이란은 알라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신정국가다. 때문에 국가 체제를 흔들거나 권위에 불순종하는 것은 바로 알라를 거역하고 이슬람 신앙을 배신하는 행위와 동등한 죄로 여기고 다스리니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란 사람들이 하는 재미있는 농담이 있다. ‘이란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어서 개인이 원하는 무슨 말이든지 자유롭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유는 말하는 순간까지이고 일단 말을 하고 난 후에는 그 자유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 공화국의 모순
이란은 1979년도에 2500년 동안 이어 오던 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혁명을 일으키면서 국호를 ‘이슬람 이란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으로 바꿨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자체 모순을 가지고 있는 체제다. 왜냐하면 이슬람이라는 말은 복종이라는 말이다. 알라의 뜻이라면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들의 논리나 상식이나 취향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절대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공화국은 인간이 최고의 결정권을 가지는 체제다. 모든 것은 투표로 결정하고 이미 결정된 것이라도 사람들의 회의나 합의를 통해서 변경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슬람 체제와 공화국 체제는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섞어 놓은 체제라는 말이다. 그래서 일반 공화국처럼 투표도 하고 선거도 하지만 결정권은 알라의 이름으로 최종 결정을 하는 종교지도자의 권한에 달린 것이다.
돌파구를 찾은 민의(民意)
국민들의 뜻이 분명할지라도 그것이 알라의 뜻이 아니라면 국민들은 양보를 해야 한다. 알라의 뜻을 결정하는 최고의 위치에는 하메네이가 자리를 잡고 있다. 공화국 체제이기에 민의를 묻기는 하지만 그것이 알라의 뜻을 거스를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국회가 있기는 하지만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법이라도 알라의 뜻을 물어야 한다.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가 알라의 이름으로 최종결정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의 뜻은 항상 굽혀야 했고 무시되어 왔던 것이다. 그것을 지난 30년 간 국민들은 참고 또 참았다.
지난 선거는 30년 간 무시당해왔던 민의가 폭발한 것이었다.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무사비의 정권탈환이냐 아마디네자드의 재선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최고 지도자의 최종 결정이 틀렸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이었다. 이번에 함께 출마했던 4명의 후보 중 1명이었던 레자이(Rezaei)는 투표율이 95~140%나 되는 170개의 투표구 목록을 제시하면서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부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유권자 수보다 40%나 많은 표가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번 선거는 과거 어떤 다른 선거보다도 더 공정한 선거였다고 말하면서 이 결과를 거역하는 자는 이슬람을 거역하고 알라를 배신하는 자라고 선언하였다. 즉 죽여도 좋다는 말이다.
국민들의 분노
거리로 밀려 나온 국민들은 30년 동안 쌓였던 한을 풀 작정으로 외쳐댔다. 결과는 유혈이 낭자한 대규모 폭력 및 살인 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가 막힌 것은 국민들을 쏴 죽여 놓고도 장례를 위해서 시신을 찾아가려면 미화 3000~4000불의 총알 값을 지불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사람을 잡아서 투구를 벗겨보니 이란어가 안 통하더라는 것이다. 즉 진압 요원들이 부족하니까 아랍인들을 고용한 것이었다. 국민들은 총구 앞에 맨주먹으로 외치고 있다. 그들도 인간이기에 무모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어 거리로 나오는 인원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해외의 이란인들
해외의 이란인들은 몸이 달아 있는 상태다. 그들의 일상은 매일 외신을 뒤지며 조국에서 새로 올라온 동영상이나 인터넷 기사들을 섭렵하는 것이다. 밤은 있으나 쉴 수도 잘 수도 없다고 한다. 친척이나 친한 친구들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울면서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 기가 막혀서 일부러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지금 웃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펑펑 울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종점은 어디일까
17세기 말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외치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한 패트릭 헨리의 명연설이 있었다. 비록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의 말에 힘을 얻은 사람들에 의해서 1776년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여 지금은 세계 최강의 나라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이란은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이대로 주저앉아서 계속 이슬람의 샤리아 법으로 다스리는 신정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엄청난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국은 자유를 쟁취할 것인가.
아무도 속단할 수 없는 조심스러운 부분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만일 이란이 국민의 승리로 자유와 인권을 회복하게 된다면 이는 1979년도 이슬람 혁명의 성공을 통해 모든 이슬람 국가의 원리주의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한 것 이상으로 이슬람 국가들의 신정체제가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 너무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그리고 이란에 완벽한 인권이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도 속히 보장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이는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이래로 가장 온건한 대통령이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하타미 정권이 8년 간 통치했을 때에도 이란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란 사람들은 그렇게 열광적으로 거리로 뛰쳐나와 근 3주 동안이나 목이 터지게 외치고 있을까.
이란의 찬란했던 과거
이란은 한 때 세계를 정복했던 나라다. BC 6세기 이란의 조상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은 세계 최강의 나라를 세웠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가장 완벽한 인권선언을 했던 사람이다. 이란의 문명은 아랍 문명과는 차원이 달랐다. 쉬라즈라는 도시에 가보면 이란의 유명한 시인 하페즈나 싸아디의 묘지를 잘 꾸며놓아서 지금도 관광객들이 입장료를 내고서라도 꼭 들르려 하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하마단에 가보면 부알리 씨나의 박물관이 있다. 그는 수학, 지리학, 논리학, 철학, 화학, 천문학, 문리학, 심리학 등 모든 분야에 뛰어난 학자였으며 그의 작품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이 있다. 하마단에 있는 최상의 것들은 식당이든 호텔이든 대학이든 모두 그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또한 이란의 자랑거리인 석조 문화를 보면 이미 BC 5세기부터 엄청난 석조 건축이 발달하였다. 세계 문화재로 지정된 쉬라즈의 페르세 폴리스(Parse Polis)는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의 웅장함과 로마의 석조 문화의 정교함을 합쳐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란의 석조 기술이 로마로 건너가서 체온이 느껴질 정도의 질감을 표현하는 찬란한 로마의 석조 문화가 꽃피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수준 높은 이란의 문화 덕분에 아랍의 이슬람 문화가 덩달아 격상된 것이다.
페르시아의 자존심은 고고한 것이어서 이들이 비록 이슬람은 받아들였으나 이집트처럼 언어를 아랍어로 바꾸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슬람 국가지만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란의 문화가 아랍의 문화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라는 것을 지금도 의연하게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난 지금은 이슬람 율법으로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원리주의 무슬림들이 이란을 통치하고 있다.
이슬람 혁명이 가져온 큰 변화
이슬람 혁명은 이란 사람들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저 단순히 팔레비 왕조가 물러가고 호메이니(호메이니가 죽은 후 하메네이가 종교지도자 지위 승계)가 들어와서 이슬람의 샤리아 법으로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차원이 아니다.
하늘과 땅 차이로 변한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 첫째는 경제가 곤두박질했다는 것이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때만 하더라도 이란의 경제는 중동의 최고였다. 그 때의 환율은 미화 1불 당 70리알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미화 1불 당 9500리알 정도나 된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피부에 와 닿는 예를 들어보자면 1994년에 한국에서 조립한 프라이드(Pride) 베타 차량을 새 차로 뽑을 때 4800만 리알을 지불했었다. 그리고 그 차를 10년 간 타다가 2004년에 중고품으로 다시 팔았는데 놀랍게도 그 판매가격은 5000만 리알이었다.
두 번째 이슬람 혁명이 가져온 국민들이 느끼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이슬람 율법의 강요다. 이전에 왕이 다스릴 때는 여성들의 복장은 유럽 복장과 마찬가지였다. 당시엔 아무도 복장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의 모든 여성들은 외국인도 예외 없이 12세 이상이면 무조건 베일을 착용해야 한다. 라마단 달에 한 달 간 해야 하는 이슬람의 금식도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다. 이 기간엔 해가 있는 동안에는 물도 마실 수 없을 뿐 아니라 껌도 씹으면 안 되며 심지어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까지도 잡아간다.
유럽식 자유를 누리던 사람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에 7세기에 아랍 사람들의 문화를 강요 받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러나 반항의 대가로 엄청난 징계가 따르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했다. 오늘날 경제가 곤두박질하도록 만든 장본인들이 이슬람 율법을 강요한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이란은 알라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신정국가다. 때문에 국가 체제를 흔들거나 권위에 불순종하는 것은 바로 알라를 거역하고 이슬람 신앙을 배신하는 행위와 동등한 죄로 여기고 다스리니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란 사람들이 하는 재미있는 농담이 있다. ‘이란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어서 개인이 원하는 무슨 말이든지 자유롭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유는 말하는 순간까지이고 일단 말을 하고 난 후에는 그 자유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 공화국의 모순
이란은 1979년도에 2500년 동안 이어 오던 왕정체제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혁명을 일으키면서 국호를 ‘이슬람 이란 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으로 바꿨다.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자체 모순을 가지고 있는 체제다. 왜냐하면 이슬람이라는 말은 복종이라는 말이다. 알라의 뜻이라면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들의 논리나 상식이나 취향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절대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공화국은 인간이 최고의 결정권을 가지는 체제다. 모든 것은 투표로 결정하고 이미 결정된 것이라도 사람들의 회의나 합의를 통해서 변경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슬람 체제와 공화국 체제는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섞어 놓은 체제라는 말이다. 그래서 일반 공화국처럼 투표도 하고 선거도 하지만 결정권은 알라의 이름으로 최종 결정을 하는 종교지도자의 권한에 달린 것이다.
돌파구를 찾은 민의(民意)
국민들의 뜻이 분명할지라도 그것이 알라의 뜻이 아니라면 국민들은 양보를 해야 한다. 알라의 뜻을 결정하는 최고의 위치에는 하메네이가 자리를 잡고 있다. 공화국 체제이기에 민의를 묻기는 하지만 그것이 알라의 뜻을 거스를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국회가 있기는 하지만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법이라도 알라의 뜻을 물어야 한다.
최고 지도자(Supreme Leader)가 알라의 이름으로 최종결정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민들의 뜻은 항상 굽혀야 했고 무시되어 왔던 것이다. 그것을 지난 30년 간 국민들은 참고 또 참았다.
지난 선거는 30년 간 무시당해왔던 민의가 폭발한 것이었다.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무사비의 정권탈환이냐 아마디네자드의 재선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최고 지도자의 최종 결정이 틀렸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이었다. 이번에 함께 출마했던 4명의 후보 중 1명이었던 레자이(Rezaei)는 투표율이 95~140%나 되는 170개의 투표구 목록을 제시하면서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였다. 부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유권자 수보다 40%나 많은 표가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번 선거는 과거 어떤 다른 선거보다도 더 공정한 선거였다고 말하면서 이 결과를 거역하는 자는 이슬람을 거역하고 알라를 배신하는 자라고 선언하였다. 즉 죽여도 좋다는 말이다.
국민들의 분노
거리로 밀려 나온 국민들은 30년 동안 쌓였던 한을 풀 작정으로 외쳐댔다. 결과는 유혈이 낭자한 대규모 폭력 및 살인 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가 막힌 것은 국민들을 쏴 죽여 놓고도 장례를 위해서 시신을 찾아가려면 미화 3000~4000불의 총알 값을 지불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사람을 잡아서 투구를 벗겨보니 이란어가 안 통하더라는 것이다. 즉 진압 요원들이 부족하니까 아랍인들을 고용한 것이었다. 국민들은 총구 앞에 맨주먹으로 외치고 있다. 그들도 인간이기에 무모한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어 거리로 나오는 인원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해외의 이란인들
해외의 이란인들은 몸이 달아 있는 상태다. 그들의 일상은 매일 외신을 뒤지며 조국에서 새로 올라온 동영상이나 인터넷 기사들을 섭렵하는 것이다. 밤은 있으나 쉴 수도 잘 수도 없다고 한다. 친척이나 친한 친구들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울면서 눈이 퉁퉁 부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 기가 막혀서 일부러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지금 웃고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펑펑 울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종점은 어디일까
17세기 말에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외치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한 패트릭 헨리의 명연설이 있었다. 비록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의 말에 힘을 얻은 사람들에 의해서 1776년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여 지금은 세계 최강의 나라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이란은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이대로 주저앉아서 계속 이슬람의 샤리아 법으로 다스리는 신정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엄청난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국은 자유를 쟁취할 것인가.
아무도 속단할 수 없는 조심스러운 부분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만일 이란이 국민의 승리로 자유와 인권을 회복하게 된다면 이는 1979년도 이슬람 혁명의 성공을 통해 모든 이슬람 국가의 원리주의자들에게 동기부여를 한 것 이상으로 이슬람 국가들의 신정체제가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 너무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그리고 이란에 완벽한 인권이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도 속히 보장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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