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 중심의 서구 사회와 이슬람 세계 사이에 대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고 암시했다. 2001년 9·11테러,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이를 확증해 준 축소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종교 단체 간 대결, 신학적 대결, 영적 현상 및 회심 대결 등에서 양 종교는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테러와 대 테러 전, 종교 박해와 같은 형태로도 대결은 계속되고 있다.

이슬람은 어떤 종교인가? 그들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말하는가?

기독일보에서는 김덕래, 초미성 선교사의 글을 통해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간다.


▲초미성, 김덕래 선교사(왼쪽부터)
(선지자)무하멧(무함마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우리는 지난 20년동안 다양한 무슬림들을 만나 보았다. 우리가 선교사라고 해도 코도 작고 눈도 작은 우리는 백인이 아니어서 절대 선교사일리 없다는 그들의 대답에 웃으며 "그래 우리는 친구야"하고 교제를 나눈적이 많았다. 그렇게 친절하고, 순해 보이며 우리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줄 것 같던 무슬림 친구들이지만 기독교나 이슬람에 대해 대화하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 버리곤 한다. 그리곤 그들이 꼭 묻는 질문이 있다.

“(선지자)무하멧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무하멧은 서기 570년경에 태어났다. 어려서 조실부모하여 삼촌 가정에서 자랐다. 그가 속한 꾸라이시 부족은 베두인의 생활 양식을 따라 사막의 텐트에서 사는 아랍유목민으로 접대를 잘하며 가난한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어려서 고생을 하였으나 청년시절 재력있는 연상의 과부(카디자)와 결혼함으로 편안해진 그는 명상에 잠기게 되고 산속 동굴(Hira)에서 계시를 받아 이슬람을 창시하게 된다.

무하멧과 아라비아
당시는 아랍 반도가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로마와 페르시아는 백년동안(540-629)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하면서 서로를 천천히 멸망의 길로 가게 하고 있었다. 이는 6세기 메카가 새로운 무역의 중심지가 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고, 아랍 전통 가치관에 혼란이 오면서 사회적으로 불안해지고 있었다.

또한 무하멧이 살던 아라비아는 이방종교가 난무했다. 아랍 부족들은 우상 숭배자들로 특히 하늘에 있는 물체를 숭배하기를 즐겨하였다. 꾸란에도 태양, 밤, 달, 날, 악한 영 등에 관련된 장들이 많이 있다. 절대자로서의 하나님 알라라는 이름과 개념은 이슬람적 특성이 아니다. 꾸란을 보면 알라를 예배함은 이슬람이 생기기 전의 판테온의(신들을 모신 신전) 예배 체제의 통합적 의미로 나타나있음을 알 수 있다. (29:65; 31”31;26:61-63)

무하멧과 기독교
AD 476년 로마제국의 서쪽 진영은 힘을 잃고 있었으나 동쪽은 아직도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었고 많은 이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아라비아가 헬라인이나 로마인에게 직접 지배를 당한 적은 없으나 그 문화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라비아는 북쪽의 비잔틴 제국과 남쪽의 아비시리안(현 이디오피아)를 연결해 주는 주요한 무역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하멧은 이미 아라비아에 번진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해 어려서부터 익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무하멧이 살던 지역은 기독교 이단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이슈가 가장 큰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정하나 신성은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그리스도는 두 본질과 두 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네스토리안파등이 그 대표적이다.

이러한 배경을 볼 때, 왜 꾸란에 있는 예수에 대한 구절들이 이중적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꾸란의 어느 부분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완전히 부인하면서도 (2:16), 또 어디는 예수가 다른 선지자들과는 그 격이 다른 매우 높게 평가하는 부분을 볼 수 있게 된다. 예수의 기적 행함(5:112-113), 예수와 성령과의 연합(2:86), 메시야로 불림(3:45), 예수의 동정녀 탄생(3:47)등이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무하멧이 기존 아랍들의 우상숭배와 유대,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이단 등을 모두 보며 그로 인한 분열, 혼란을 진압할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런 환경은 그로 하여금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쉽고 분명한 유일신을 만들게 하는 정당성과 그 틀을 마련해 준 것이다.

무하멧은 우상숭배를 뒤로 하고 유일신 알라에게 예배할 것을,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이 처음 하나님께 받은 계시와 말씀을 변질, 타락 시켰기에 모두 원래 계시로 돌아올 것을 강조했다. 또 그는 과부와 고아 등을 돌볼 사회 정의 구현을 주장했다.
무하멭은 왜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을까?
유대인과 기독교를 그 책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라 부르며 신구약 증거에 관심이 많던 무하멧은 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을까? 한 번쯤 의문해 볼 수 있다.

먼저 당시는 아랍어로 된 성경이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해 정확히 연구해 볼 기회가 없었다. 그저 여기저기서 조금씩 성경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 지식이 매우 단편적이었다. 이는 또 페르시아 제국과 비잔틴 시리아 내 그리스도인들이 아랍인들을 향한 복음화에 대해 관심이 없었음은 아닐까 유추해본다. 당시 선교사들이 시리아어 혹은 중국어로 혹은 중앙 아시아 몇 부족어로 번역하였으나 아랍어로는 하지 않음은 혹 아랍인에 대한 편견과 무시함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본다.

둘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분열되어 혼란 속에 있었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듯 교리적으로 이단이 성하고 이로 인한 교회의 분열이 심하다 보니 비신자 입장에서 기독교의 모습이 아름다웠을리 만무하다. 또 기독교가 아라비아 인근의 제국주의자들과 정치적 연관을 맺은 것도 부정적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자신이 받은 계시를 철저히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객관적인 평가보다는 자비로우신 알라가 나를 선택하셨다는 절대적 오만과 확신이 그를 사로 잡은 것이다. 자기 스스로 인증한 선지자로의 그의 권능은 그를 따르는 자에게는 가장 큰 강점이지만 그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가장 큰 약점이 되고 말았다. (사무엘 모펫)

무하멭과 무슬림
무하멧의 생전과 죽음 후 지금까지 그는 알라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무슬림들의 롤모델이 되어 왔다. 이슬람은 무엇보다 행위를 강조한다. 무슬림들은 무하멧이 살아 있는 꾸란이라고 여긴다. 그의 말과 행적은 알라의 계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인 존재로 강조하여 보는 것에 비해 무슬림들에게 무하멧은 영적 뿐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 여겨진다. 무슬림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무하멧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한다. 친구 뿐만 아니라 적을 대하는 법, 먹고 마셔야 하는 일, 슬퍼하는 혹은 축하하는 법 등 일상의 모든 것에 무하멧의 삶을 모델로 삶는다. 이는 이슬람 생기기 전 시대의 아랍들이 따르던 전통에- 수나 sunnah – 어긋나는 일이다. 아랍들은 그들의 전통과 풍습을 구전과 삶의 양식을 통해 세대에 거쳐 전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무하멧은 이 전통을 개혁하여 그의 언행이 기록된 그의 순나가 만들어짐에 모든 무슬림의 삶의 표본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종교와 삶이 분리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하멧의 개인적, 정치적,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을 기록한 것을 '하디스'라 하는데, 모든 무슬림들은 그가 행한대로, 기도한대로, 예배한대로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물론 무슬림들이 무하멧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무하멧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렇듯 무하멧은 무슬림들에게 절대적 존재이므로 우리가 그들과 대화할 때 그를 모독하는 그 어떤 표현도 해서는 안된다. 물론 무슬림들은 우리가 그를 선지자로 믿냐고 물을 것이다. 그 때마다 우리는 그가 어지러운 아랍을 하나로 만든 위대한 리더였고 우상숭배를 없애고자 한 훌륭한 종교 지도자요, 사회의 부정부패를 타파하고자 한 사회 개혁가였다고 답하곤 했다. 무엇보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간혹 내 마음속에 있는 무하멧에 대한 진정한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 질문은 그들이 우리가 더 이상 대화를 해야 할 상대인가를 결정하는 잣대가 되기에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하다.

물론 그에게 약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이 땅의 그 누구도 완전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따라서 그의 약점, 예를 들면 불우한 어린시절이나 일부다처를, 그 중 아주 어린 아이도 있었던 비도덕성을, 혹은 그를 정신분열자로, 전쟁을 통한 정복자, 심지어는 거짓 선자자등으로 표현하여 무슬림과의 대화의 단절을 이끌 필요는 없다. 아무리 좋은 복음이라도 듣는 자가 없다면 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하멧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무하멧은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나 대속자없이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죄의 삯을 치룰 수 밖에 없는, 가련한 한 영혼에 불과함을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인생의 깊은 곳에서 고민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쉽게 그리스도인을 접할 수 있었음에도 누구도 그에게 확실하고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한 그의 영혼은 진리를 찾아 갈급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거짓 영은 그의 연약함을 삼키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영혼들이 미혹의 영에 의해 그의 길을 따르다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다. “난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무슬림으로 살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구도 나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해 주지 않았답니다.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 도리가 없었답니다. 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 가족이, 내가 속한 사회와 나라가 가르쳐 주는 것을 성실히 따르고 행했는데 그것이 멸망의 길이었습니까?”
그들에게 돌 던질 자 누구인가?

이 글을 쓰는 내게 무하멧은 예수 믿기 전 진리를 찾아 헤메던 과거의 내 모습이요 그를 따르는 무슬림들은 누군가 내게 예수를 제대로 전해주지 않았다면 겪어야 했을 내 미래의 모습이다. 교회가 있었음에도, 그리스도인이 있었음에도 복음을 받지 못하고 사랑이 넘치는 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간 그의 운명은 분명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예수 믿는 공동체에게, 그리스도인인 내게 전해주는 가슴 찡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며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 9:36)

나의 무지함으로, 게으름으로, 무능력함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또 다른 무하멧이 지금 내 가슴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