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의 아버지들이 가장 흔히 쓰는 말은 “힘들다”이고,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무기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자괴감은 언제부터인가 그들 삶의 한 부분처럼 되어 깊숙이 박혀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아버지들의 무력감은 살벌한 경쟁 사회인 일터나 직장에서 경험하는 것만이 아니라, 피곤하고 무기력해진 자신에게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믿어온 가정에서 조차 경험한다는데 그 심각함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주일에 지난 주간 읽은 요즘 아버지들에 대한 고백적 글을 나누면서,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한 마디 건네 봅니다. “아버지들이여, 그래도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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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김영수 씨(50•자영업)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으로 집에 들어선다. 아내는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에게 푹 빠져 고개도 안 돌린 채 "왔수?"라고 건성으로 인사만 건넨다. 자기 방에서 MP3로 음악을 들으며 인터넷 채팅을 하느라 아버지가 귀가했는지도 모르던 대학생 아들은 방문을 여니 고개만 까딱한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에 한쪽 귀고리. "사내자식이 그게 뭐냐"는 말이 어금니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는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고등학생 딸이 학원에서 돌아온다. 자기가 돌아왔을 땐 본 척도 않던 아내는 "아유, 고생했다. 배고프지? 뭐 먹을 거줄까?" 하며 아이에게 달려간다. 그제야 내일 막아야 할 어음 때문에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저녁도 못 먹은 게 기억난다. 딸 곁에서 한 숟가락 뜨고 싶어도 "여태 밥도 안 먹고 뭐했냐"는 잔소리를 듣는 것이 귀찮아 쓰린 속으로 잠자리에 든다. 잠이 올 리 없다. 내일 막아야 할 돈도 다 못 구했는데….

"밖에서 피 말리는 전쟁을 치르고 집에 돌아오면 집에서는 마치 내가 '투명인간' 같아요. 가족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어쩌다 눈에 띄어도 왕따지요. 마누라와 자식 먹여 살리느라 하루 종일 땀 흘리는데 그걸 알아주기는 커녕 인사조차 못 받으니… 불경기라 회사는 어렵고, 집에서도 웃을 일이 없고… 베란다에 서 있으면 가끔 떨어져 죽고 싶다는 충동을 느껴요."

통계에 의하면 남편 3명중 1명은 아내에게 폭력을 당하고(여성부 통계자료), 남성 3명 중 1명은 암에 걸리며(여성은 5명중 1명), 40대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의 4배이며 세계 1위라고 한다. 이제는 존경스럽기는커녕 멀쩡한 아버지를 찾기도 힘들다.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를 봐도 '전원일기'의 김 회장처럼 당당하고 위엄 있는 아버지는 없다. 밥상에서도 마누라 눈치 보느라 맛있는 반찬에는 젓가락도 못 대고, 생업전선에 나선 아내를 대신해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등 아버지는 대개 무능하거나 푼수로 그려진다.

현재 40~50대 중년층인 아버지들은 헛기침만으로도 위엄을 세우고 돈을 못 벌어도 무시당하지 않고 바람을 피우고도 당당하게 아내에게 따뜻한 밥을 얻어먹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들이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하며 열심히 공부했고, 취직한 후엔 앞만 보고 달리며 자랑스러운 가장이 되겠다고 사회의 온갖 수모를 참아온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영광의 트로피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의 싸늘한 시선뿐이다. 직장생활도 잘 버텨야 하고 가정에선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 친구 같은 아빠여야 하고 장보기도 함께 하고 설거지 정도는 기본으로 하는 양성 평등한 남편이어야 겨우 괜찮은 아빠란 소리를 듣는다. 물가보다 더 높게 오른 것이 아버지에 대한 기대치인 것 같다.

그래도 IMF 무렵에는 견딜 만했다. 온 나라가 나서서 고개 숙인 아버지, 불쌍한 아빠를 감싸고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젠 그런 온정은 기대하기 힘들다. 사오정, 오륙도 등 조로화한 사회라 직장에서도 버티기 힘들다. 평균수명은 자꾸 늘어 이제 유전자지도가 다 밝혀지고 줄기세포도 대중화하면 100살은 너끈히 산다는데 앞으로 50~60년을 계속 왕따로 살아야 할까?

물론 아버지란 직책에 비상등이 켜진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가부장문화가 사라지고 호주제까지 폐지되어 아버지들의 심리적 불안감과 박탈감은 커진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에게 항상 성공을 강조하고 엄격함을 요구하던 아버지들은 흘러간 유행가, 철 지난 우스개 같은 존재다. 이제 스스로 변신을 하지 않으면 아버지들은 뼈 빠지게 일만 하다가, 혹은 안방에서 혼자 가장놀이를 하다가 더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가야 한다.

그래서 어느 정신과 의사가 아버지들에게 주는 말에 공감이 간다. ‘아버지들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자신에게 상(賞)을 줘야 한다. 40년 이상을 착한 아들, 훌륭한 아빠가 되기 위해 발버둥 쳤으면 이제는 더 이상 가족이나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좀 쉬어도 된다. 중년 돌연사 1위, 40대 남성자살률 1위의 대한민국에서 아직 죽지 않고 버텨온 것. 가족을 버리거나 버림받지 않고 함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다. 마음껏 웃고, 실컷 울고, 때론 아주 유치한 모습을 보이면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이 땅의 아버지들이 건강하게 버티는 방법이고 가족들에게 이해 받고 사랑 받는 비결 이다. '가장'이란 부담과 권위의 갑옷은 벗고 이제 가볍고 따스한 사랑의 옷으로 갈아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