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함께 타고 가던 자동차가 트럭과 부딪치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어린 두 자녀를 한꺼번에 잃은 여성이 이들의 장례식을 잔치처럼 밝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같은 고통을 받는 게 자기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슬픔을 잠재하고 행복하게 저들을 자신의 품안에서 떠나보냈던 것이다.

루마니아 서픈짜 마을에는 “즐거운 묘지”가 있어 유명 관광지가 되고 있다. 묘비들에 화려한 색상을 입히고 죽은이가 살아생전 겪었던 일들을 1인칭 화법을 사용해 짤막하나마 재미있고 교훈적인 이야기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인데 정작 그 내용을 보면 한이 서리 서리 맺힌 것들이다.

심지어 어려서 자동차에 치어 죽은 어린 딸의 묘비명에는 모든 택시 기사를 저주하는 글이 새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묘지가 되는 것은 저들은 죽음을 한의 절정이 아니라 휴식으로, 꿈으로의 통로로 여기고 있는 까닭이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빼르 라 셰즈는 유명한 공동묘지로 관광명소다. 저들은 에펠탑, 개선문, 몽마르뜨 언덕 만큼이나 이곳을 아름다운 문화공간으로 가꾸어 프랑스의 문화와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하였다. 프랑스 뿐아니라 내가 찾아본 유럽의 대부분의 묘지는 한이 서려 원귀가 떠도는 현장이 아니라 엄숙하지만 웬지 밝고 즐거운 공원이었다.

이에 반하여 한국인의 전통적 장례식은 한풀이의 절정이다. 망자를 무덤까지 운반하는 꼭두가 흔드는 요령소리와 상여꾼들의 소리 합창은 상주들의 곡(哭)과 어우러져 진혼곡 못지않게 애간장을 녹인다. 상가(喪家)의 세(勢)에 따라 휘날리는 만장은 사자의 혼이 너울거리며 구천의 세계로 안착하게 하는 길잡이라 한다.

최근 자살한 대통령의 한을 풀어주는 장례식을 통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한을 동시에 풀어 날려 보냈을 것이다. 하기는 씻김굿까지 했다면 저들에게는 더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 한줌의 재가 되거나 사체를 묻어 무덤을 만든다 하여도 정작 죽은 자는 한이 없다. 그저 살아남은 자들의 한 풀이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없는 死者에게 기를 쓰고 말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측은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권세를 잃은 한을 그 정도로 마무리하고 일상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데 한을 울거서 또 다른 한을 만드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보면서 통탄을 금치 못한다. 대한민국이란 판을 깨자는 것인가? 옛 선현들은 한이 있어도 판을 깰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애곡성은 있으되 죽은 자를 빙자한 한판의 즐거운 장례였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울고 한편으로 웃고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며 심지어 노래와 춤사위까지 곁들인 것이 한국의 장례문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