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열린 독도 국제 심포지엄을 통해 독도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킨 워싱턴 독도수호특별위원회의 회장,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회장이면서 작년 말 워싱턴 포스트지에 재기에 성공한 사업가이자 상징적 인물로 다뤄진 최정범 집사를 만나보았다.<편집자주>

절망과 좌절을 딛고 정부 기관의 식당 운영권을 따낸 성공한 기업인-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최정범 집사는 초등학교 6학년때 미국에 이민왔다. 신앙심이 깊고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던 그는 미국에서 많은 고생을 하게 된다. 당시 그의 가족이 품었던 아메리칸 드림은 뉴욕에서 운영하던 세탁소가 화재를 당하고, 어머니가 권총 강도를 당하면서 정말 꿈이 되고 말았다.

뉴욕의 예술고등학교(High School of Performing Art)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던 최집사는 학업을 중단하고 하루 17시간씩 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최 집사 특유의 뚝심과 열심, 신앙으로 버티며 악바리처럼 대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신앙이 깊은 아내를 만나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크고 작은 행사를 맡아하는 기획사 겸 여행사를 운영했던 그는 30여명의 직원을 둔 규모 있는 사업체로 키워갔다. 그러나 순조롭게 갈 것만 같았던 사업은 갑자기 터진 IMF 사태로 인해 망하게 되었다.

"당시 900원대 하던 환율이 1900원대로 치솟았죠. 카네기홀 공연 등과 같은 모든 것이 다 취소되었습니다."

최집사는 신장을 팔아 빚을 갚을까 생각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서 자살까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러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스리랑카 단기선교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스라랑카의 상황은 모든 것을 잃었다며 자포자기한 그를 그가 현재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할 줄 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제게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건강이 있었고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저는 그 동안 제가 갖지 못한 것을 얻지 못했다며 괴로워하고 있었죠. 감사를 찾게 되니 마음에 평안이 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닥부터 다시 시작한 그는 미국 해안경비대 본부의 구내식당 운영권을 따내면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식당을 잘 운영하니 잇따라 다른 정부기관의 구내식당 운영권도 따낼 수 있었다. 그의 사업체인 I.L. Creations는 현재 직원만 320여명, 연 매출액이 2000만달러가 넘는 큰 규모로 성장하게 되었다.

한 시도 내 뿌리를 잊은 적 없어, 내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전 인류를 위해 일하는 것

비교적 어렸을 때 이민 온 사람은 한국어가 그다지 유창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최집사는 흠잡을 데 없이 유창한 한국어를 자랑한다. 유난히 한국을 사랑하고 그가 몸담고 있는 한인 커뮤니티를 사랑해서이다.

"아이들에게도 한국어를 꾸준히 가르쳐 왔습니다. 말에는 혼이 담겨있는데, 아이들이 우리 말을 못하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기가 힘들죠. 사람은 뿌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명확하게 알아야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그 동안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원회 회장, 워싱턴 독도수호대책위원장을 맡아 일하면서 이 일이 오로지 내 민족만을 위한 일이라며 민족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일한 것은 아니다.

"역사는 어느 민족에게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합니다. 내 민족에게 일어났던 비극이 다른 민족에게 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내 민족이 당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일하는 것은 결국엔 전 인류의 역사적 발전을 위해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에 합당한 의무와 도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이 해야 할 도리를 한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일하는 최집사. 위 두 단체에서 일하는 이들 모두가 한 자리 차지하려고 하거나 정치적인 속셈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다. 최집사와 같이 순수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 것. 이것이 말 많고 탈 많은 여타 단체들처럼 시끄럽지 않은 이유다.

"저는 많은 1.5세, 2세, 3세들이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뛰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미국에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만들어가는 삶, 그 안에서 만들어 지는 크고 작은 모임들이 일부만이 누리고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대와 모든 것을 초월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되길 원합니다."

최집사 자신의 자녀들이, 또한 다른 한인 2세들이 이 시대의 다니엘, 느헤미야, 요셉이 되었으면 한다는 최집사.

"미국에 살아가는 한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곳에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일들을 잘 찾고 그러한 일들을 잘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순수한 신앙적 양심을 가지고 뭐든 다부지게 하고 싶다

최집사는 사업가이기도 하지만 베다니 장로교회(담임 김영진 목사)의 집사이기도 하다. 바쁜 중에도 수요예배 때는 최집사는 기타를 메고 찬양을 인도한다. 그의 신앙은 고등학교 시절 아스토리아 한인장로교회(뉴욕소재)의 주일학교 담당교사였던 이시영 장로(당시 외무부 차관으로서 UN에 파견근무 중), 벧엘교회의 담임 목회자였던 김상복 목사(현 할렐루야 교회 담임)을 통해 뿌리 깊게 자라날 수 있었다고 한다.

신앙인으로서, 행복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책임감을 가진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는 최집사.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하는 사업을 통해 많은 선교사님들을 섬기고 위로하는 사역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나누는 게 행복합니다. 신앙적 양심을 가지고 사업이든, 사회적인 일이든, 그리고 교회와 선교지를 섬기는 일이든 다부지게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