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거리 나무마다 초록 잎이 만발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눈부신 봄이 시작된 4월은 장애인의 달이었다. 그래서 4월은 장애인들과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을 섬긴 자원봉사자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준 달이었다.

본지는 지난 26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개최된 국제장애인선교협회 ‘서로 잡은 손’ 행사에서 1991년부터 2009년까지 4000시간 이상을 봉사해 대통령상을 받은 뉴욕새예루살렘교회 노기송 목사를 지난 29일 만나 보았다.


1. 처음에 봉사 사역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십니까?

목회자가 되기 전 새문침례교회 집사로 있을 때, 교회 건물이 우드사이드에 있었는데 7번 트레인 밑이었습니다. 그때 교회에 백인 흑인 심지어 한국 홈리스까지 찾아왔고 교회에서 그들을 잘 도와줬습니다. 처음에는 홈리스들이 오면 100불 200불 막 줘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나니까 여기저기서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 돈으로 술을 사서 마시거나 마약을 사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또 너무 많이 찾아오니까 교회에서 감당을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1988년경이었는데 그 때가 경기가 정말 좋은 때여서 제가 하고 있던 드라이클리닝 사업도 잘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아예 홈리스들은 저에게 맡겼습니다. 교회에 홈리스들이 오면 성도들이 "노 집사님! 예수님 왔어요"하고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홈리스들을 예수님처럼 여기려는 마음에서 '예수님~'이라고 불렀었거든요.

그들이 찾아오면 제가 그때부터는 돈을 직접 주지 않고 슈퍼마켓에 데리고 가서 먹을 것을 고르라고 하고, 트레인 토큰이 필요하면 사서 주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한국 홈리스가 왔는데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때 서니사이드 45가에 있던 대동면옥에서 갈비를 사 준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홈리스들을 도왔는데, 한번은 청년 홈리스를 만났습니다. 사연을 들어보니 가족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혼자 뉴욕에 와서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직업을 잃고 숙소에서도 쫓겨나 홈리스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이 하는 말이 여기서는 회생할 가망이 없으니 한국에 갈 여비만 주시면 제가 한국에 가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총영사한테 얘기를 해서 도움을 받아, 속옷까지 사 입혀서 그 청년을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그랬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한 통 왔는데 받아 보니 그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뭐라고 하냐면 "집사님, 뉴욕에서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겠습니다"하더군요. 그 청년에게 전화를 받고 참 보람을 느꼈습니다. 홈리스들을 도와주다 보면 그들에게 때로 속기도 하는데, 10명을 도와주다 9명한테 속아도 1명이 회생되면 귀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사역을 주셨구나하는 사명감도 갖게 되었습니다.

2. 목회자가 되신 것도 '봉사'를 하기 위해서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로 열심히 봉사했는데 저만 너무 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집사님들도 다들 열심히 하시는데 저만 너무 튀는 것 같아 좀 미안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무렵에 오래전에 목회자의 소명을 받았던 제 동생(노기명 목사)이 1991년도에 신학교에 간다면서 저한테 같이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렇지 않아도 집사님들한테 미안하던 차에 목사가 되서 봉사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나'하는 생각이 들어 집사람한테 지나가는 말로 얘기를 꺼냈는데, 3-4년 전에 얘기했을 때는 "왜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냐"며 정색하며 펄쩍 뛰던 집사람이 그때는 "그 길이 당신의 길인 것 같다"며 동의를 해줬습니다. 그때는 가게가 바쁜데도 구역장을 하며 열심히 예배 인도하고 봉사하고 그런 때여서 집사람도 그렇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도 확실하게 결정을 못하고 있었는데 화장실에 가도, 응접실에 가도 계속 '신학교'라는 단어만 쫓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집사람과 함께 3일 동안 기도하고 결정하자해서 라마나욧 기도원에 갔습니다. 거기 기도원에 가서 집사람과 3일간 기도하고 내려가는데 집사람이나 나나 특별한 응답은 없었지만 '신학교에 가야겠다' 하는 마음을 먹으니 마음이 너무 편했습니다. 나이 들어서 신학교 들어가 히브리어 헬라어 공부 해야 한다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응답인줄 알고 그 해 9월에 신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입학해서 신학생 부흥회를 하는데 그 때 강한 콜링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 길로 부르셨구나 하는 확신이 확 왔습니다. 그래서 신학공부도 얼마나 신나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1994년 5월 23일에 졸업식을 했습니다. 그때 마침 장애인을 위한 교회인 아가페한인교회를 지금 YWCA 자리에서 국제장애인선교회에서 시작했는데, 저 또한 봉사할 곳을 찾다가 예전에 알던 장로님과 친구들이 매주 모였던 우정회 모임에서 장로님이 7월부터 그 교회에 합류한다고 하시는 얘기를 듣고 저도 '아 바로 거기구나'하는 성령의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새문침례교회에서 그 해 12월 18일에 목사 안수를 받고 1995년 1월 첫 주부터 아가페한인교회에서 부목사로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7월에 우정회 모임에서 아가페한인교회의 리프트 밴 구입을 위한 후원 음악회를 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5000불로 정하고 음악회 표도 팔고, 도네이션도 받고 해서 나약 음대 최화진 교수를 모시고 후러싱제일교회에서 음악회를 했는데 호응이 너무 좋아서 3만 4천불이 모금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됐느냐면 저희가 15인승 밴을 구입해서, 거기다 휠체어가 들어가도록 시설하는데 까지 총 3만 4천불이 든 것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 밴을 제가 아가페한인교회에서 부목사로 시무하던 1995년 1월 첫 주부터 3년 반 동안 몰았습니다. 1994년부터는 플러싱에서 혼자 양로원 사역을 하기는 했지만 그 때가 목회자가 되고 나서 더욱 본격적으로 봉사를 시작한 때입니다. 매 주일 아침 새벽에 집사람과 아이들을 깨워서 밴에 태우고 예배 시간 전까지 3시간 동안 브루클린서부터 장애인들을 예배 전에 픽 업하고 예배 후에 또 3시간 동안 픽 업해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내 체질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오후에 성도분들을 다 모셔다 드리고 혼자 오다가 너무 행복해서 '구원해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습니다. 일반 목회보다 봉사를 실컷 하고 싶어 목사가 됐는데 봉사를 실컷 하니 너무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3. 목회자가 되시고 나서 ‘봉사’는 그 전의 ‘봉사’와 영역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으셨을 것이라 봅니다.

외관적으로 보이는 장애인들의 육체적인 고통보다 그들의 정신적인 고통, 영적인 고통은 몇 십배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그들의 영적인 장애가 풀리면 다 풀립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장애인 된 것 까지도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그들을 만나면 장애인들 위해서 봉사했다지만 제가 은혜를 받습니다. 화상을 입어 장애를 입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 기쁨 때문에 지금이 더 좋다고 한 이지선 양의 간증을 책으로, 실제로 접하며 예수님이 이렇게 중요한지 저도 다시 실감하게 됐습니다.

천국에 가면 육적인 장애는 다 온전케 되지만 예수님을 몰라 겪는 영적인 장애는 영원한 것입니다. 육적인 장애를 돕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영적인 장애를 풀어주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목사가 되고 나서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해서 영적인 장애를 고쳐야겠다 해서 목회자로서 설교로 예수님과 복음, 천국과 지옥을 전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되고 나서는 장애인 선교 가서 장애인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육적인 장애인들 중에도 예수님을 열심히 잘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육적으로 건강한 권사이고 장로이고 목사이지만 영적인 장애가 없는가, 주님을 바로 믿고 있는가 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4. 1991년부터 지금까지 4000시간 이상을 봉사하셔서 지난 26일 국제장애인선교협회 '서로 잡은 손'행사에서 대통령상을 받으셨는데, 오랫동안 '봉사' 하시며 느낀 봉사의 중요성에 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귀한 상을 주셔서 감사하지만 하늘나라상이 더 중요하지요. 이런 상이 있는지도 몰랐고 큰 상은 꿈도 꾸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는데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더니 하나님께서 수고하셨다고 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봉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장애를 체험하며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이 제게 은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안하고 잘 나갈 때 잘 믿는 것은 누가 못하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는 것, 이것이 정금 같은 믿음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하셨습니다. 섬기러 오고 봉사하러 온 사람은 불평이 없습니다. 내가 할 일이 없나 다른 사람이 불편하지 않나 늘 배려하고 챙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러 오셔서 제자들의 발까지 씻으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 이상의 섬김이 어디 있겠습니까. 섬김은 내가 죽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전의 내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죽어야 진정한 봉사와 섬김이 나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