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만큼 인생을 깊이 있게 연기로 표현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최근에 완역된 그의 자서전은 그의 인생과 연기 생활을 대변하는 명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허름하고 헐렁한 바지에 짧은 콧수염을 하고 전 세계인을 웃음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채플린은 그의 창의력과 인생에 대한 깊은 touch로 관객으로 하여금 웃으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게 한 깊은 페이소스(애수)로 유명한 코메디언이요 영화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비극을 사랑합니다. 비극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어떤 아름다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눈물이 있지만 그 깊은 곳에 기쁨이 있는 것이 복음으로 누리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눈물은 파워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쉽지 않더라도 그 속 깊이에 기쁨이 담겨져 있는 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눈물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생텍쥐베리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보물”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셨습니다. 눈물을 흘릴만한 일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오히려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깊은 영성에는 희로애락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눈물이 있다는 것은 마음이 부드럽고 감정이 메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땅을 부드럽게 하듯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마음을 부드럽게 합니다. 눈물은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고 우리의 영혼의 창을 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의 창이 더러울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하십니다. 눈물이 쏟아질 때마다 우리의 영혼의 창은 맑고 깨끗해집니다.

요셉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 때문에는 울지 않았지만, 형제들을 만났을 때, 특별히 친동생 베냐민을 만났을 때는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방성대곡했습니다. 그의 울음소리는 바로의 궁전에까지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터져나온 눈물이 요셉의 지나간 세월의 모든 고통을 씻었습니다. 눈물에는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셉의 마음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넓혀준 것도 바로 그가 흘린 눈물의 능력이었습니다. 눈물이 요셉의 마음을 부드럽게 한 것입니다.

교회에도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감격 때문에 울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울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 때문에 울고,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 때문에 함께 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눈물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눈물이 있는 곳에는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없는 희극은 진정한 희극이 아니다.”라고 찰리 채플린은 강변하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