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는1995년 출간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영화이다.「케이트 윈슬렛」이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더 리더는 독일어권 소설로는 최초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미국에서 1백만 부 넘게 판매된 작품이다. 권터 그라스의 <양철북> 이후 현대 독일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성공한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스티븐 달드리는 인간 내면 문제제기에 능한 감독으로 영화와 연극을 통하여 강한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다. 더 리더에서도 스티븐 달드리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여섯 살 여인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사의 복잡한 양상을 철학적인 영상 파노라마로 풀어놓은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려진 죄와 책임의 문제를 통해 진정한 과거사 청산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트렘블린 카나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만이 희생물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영화를 통하여 나치의 하수인에 불과한 한나 슈미츠(케이트 윈슬렛 분) 역시 역사의 희생양이라고 주장한다. 평범한 한 사람이 어디까지 책임을 질 수 있는가는 하는 질문은 많은 사람에게 동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된 그녀를 향하여 유대인들은 물론 방청객들과 재판부와 심지어 과거의 동료들까지 비난과 저주를 퍼붓는다. 그리하여 문맹자였던 그녀가 허위보고서를 작성하였다고 모든 죄를 전가 한다. 법정에서 필적검사만 응하였었다면 중벌을 면하였을 그녀이지만 자존심과 종신형을 바꾼다.

한국의 군부 독재시대에 악랄한 고문을 당한 이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택한 직업이라 할찌라도 그녀가 행한 행동에 대하여 그건 그녀의 독자적인 행동이었기에 무기징역형에 처해진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왜 그녀도 피해자였을 뿐이라고 조금치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과연 모든 독일국민이 본 훼퍼처럼 영웅적 행동을 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나는 아니다라고 과감하게 이야기 하고 싶다. 그 시대를 살아간 무수한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무의지, 무의식, 무능력에 대하여는 왜 이해해주지 않는 것일까?

달드리는 한나를 내세워 그녀가 여전히 자신에게 가해진 형벌을 이해하지 못한 체 체념속에 수형생활하는 것처럼 이 시대에 정의란 이름으로 또 다른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발을 한다.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청산위원회가 적어도 슐링크나 달드리의 고민을 가지고 문제 해결을 시도하였다면 또 다른 갈등을 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나와 같이 역사의 회호리 바람 속에 던져진, 일엽과 같은 평인들을 간과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나의 어린 연인으로 역사의 방관자가 되어 괴로운 일생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미하엘에게도 내리시는 은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