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와 찬양팀의 열정 무대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집사인 듯한 60대의 한 남성이 갑자기 제단 위로 뛰어 오르더니 다짜고짜 인도자의 마이크를 낚아채며 냅다 소리를 질러댄다. “야, 조용히 기도 좀 하자. 이게 성전이냐 시장바닥이지.” 헌데, 이상한 건 놀라기는커녕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싸늘하게 식어있는 교인들의 덤덤한 표정들이다. 신구 세대가 충돌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은 어색한 화해로 억지 수습은 됐지만 모처럼 친구 장로를 찾아갔던 K교회에서의 이날 예배는 허탕치고 말았다. 그런 흠 많은 제물은 하나님께서 외면했을 테니 말이다.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저절로 무릎을 꿇게 해주었던 그리운 풍금 소리가 교회 안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피아노에 밀리고 각종 관현악기들에게 제단까지 내주면서 풍금은 이제 고물상에서나 볼 수 있는 폐품으로 남게 됐다. 출처도 모르고 검증도 없는 원적 불명의 노래들이 하나님, 예수 란 문구 하나만 들어가도 무조건 복음성가로 대접 받으며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데도 속수무책이다. 덕분에 거의 120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곡조 있는 기도라 불리며 한국교인들의 신심을 일깨워주고, 사랑을 독차지했던 제2의 성경이나 다름없는 공인 찬송가마저 폐기처분될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됐다.

더러는 수심가 타령조로 부르시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하지만 몇 장? 하면 눈을 감고도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찬송가요, 1세대 부모들한테는 닳고 때 묻어온 유일한 신앙애창곡이 아니었던가. 더 좋은 노래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무슨 불만이냐고? 하지만 스크린 위를 휙휙 지나가는 가사조차도 미처 읽어내지 못하는 어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란 걸 몰라서 하는 소리다. 더구나 빠른 리듬에 때로는 박자마저 불규칙한 찬양을 따라 부르라는 주문, 그게 벙어리 흉내도 제대로 못 내는 교인들에게 얼마나 큰 고역인지 알기나 하는가.

교회는 거의 1세대들 돈으로 운영되지만 억울하고 속상해도 2세들 눈치 보느라 입 한번 벙끗 못 하고 참아야 하는 현실은 지금 한국교회가 총체적으로 앓고 있는 치유불능의 질병이다. 방법이 잘못 된 건 사실이지만 K교회의 불미스런 사건은 현대 제단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대표적인 예다. 이를테면 살 날이 창창한 젊은이들보다 여생이 다 된 부모세대들의 신앙상태가 더 위태롭다는 경고의 메시지 같은 거 말이다.

요즈음 교회들이 너무 시끄럽다. 들썩 들썩 해야만 뭐가 될 거라는 생각에 분위기 띄우느라 경쟁적이다. 교회 가기 겁이 난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렇고, 소외당하고 존재감마저 못 느끼는, 그런 게 고려장이 아니냐는 불만은 그래서다.

풍금소리가 은은하게 흐르는 제단 앞에서 “하나님…” 하고 머리만 숙여도 눈물이 앞을 가릴 것 같다는 긴 한숨의 의미를 알아주는 그날은 언제일까? 아니, 그런 기적이 생전에 일어나기나 할까? 이는 1세대 부모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는 의문일지도 모른다.

/한성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