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참은 보편인의 소욕이다. 그러나 이 알참에 대한 희구가 욕심을 동반하면 알참지상주의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것을 알차니즘(alchanism) 이라 부르기로 했다(내가 방금 만든 따근 따근한 신조어(新造語)이니 사전에 찾아도 없다).

일단 알차니즘에 빠지게 되면 그 인생은 고독하게 된다. 21세기 한국인 상(像)을 예견해 볼 때 이 알참에 대한 욕구가 너무도 지나쳐 인간성을 잃어버린 기계인간들이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차돌처럼 알찬 것이 어디있겠는가 마는 거기에는 따뜻한 생명력이 없다. 찔러도 피 한 방 울 나올 것 같지 않는 비인간화의 알참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미래를 발견할 수는 없다.

미소 천사였던 어느 여성 앵커가 국회의원이 되더니 국정에 한 몸 바쳐 얼마나 알찬 발언 행동을 하는지 화면에 등장하기만 하면 재빨리 얼띤 개그맨들의 소극(笑劇)채널로 돌려 버리게 된다. 신앙인들도 같다. 특히 목회자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알참을 요구받기 때문에 어떻게 알찬 목회성장을 이루어 가는가 하는가 보다는 어떻게는 문제가 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알이 꽉찬 성장의 결과만을 위하여 뒤를 돌아보지 않음은 물론이요 옆도 살펴보지 않고 그저 자신의 알참만을 위하여 달려간다.

알참의 견지에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선배들을 많이 보아왔던 나는 그들의 노년이 알차니즘의 함정에 빠져 새로운 세대에 밀려 표류하는 것을 보게 된다. 똑똑이 똑똑 소리를 내던 알찬 이들에 대하여 세월은 여지없이 매몰차게 저들을 퇴출해 버린다. 저들에게는 얼띤 친구가 없다. 바울이 그랬다. 그는 얼띤 자들을 매몰차게 내치는 선수였다, 바나바를 마가를 심지어는 베드로를 얼띤자의 리스트에 올렸다. 그런 그가 저 유명한 디모데 후서 4 장에서 넋두리 하고 있지 않은가?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그의 고백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의 말년은 얼띰의 회귀(回歸)였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알참은 어느 정도의 얼띰을 동반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알참의 미(美)이다. 불세출의 지휘자 루빈스타인이 바로 얼띰과 알참을 공유한 인간이었다면 카라얀은 차디찬 알참의 대명사였다. 나는 그래서 알찬 친구보다는 겉보기에는 얼띠지만 속찬 친구들이 많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사귀는 까닭이다. 저들에게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따뜻함이 있다. 저들에게서는 어눌하지만 은은한 사람냄새가 난다. 그들의 얼띰 속에는 눈물과 웃음이 있고 나눔과 공유가 있고 배려와 격려가 있다.

2008년을 보내면서 알참에 목숨을 건 동역자들에게 한번쯤은 이 얼띰의 자유와 행복을 권하고 싶다.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때가 속히 오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