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또 한 살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연수가 또 한 해 줄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세상에 대해 그 만큼 더 알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저는 쉰을 넘어 인생의 끝자락이 저만치 보이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어떻게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무신론자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젊었을 때는 뭘 몰라서 남의 주장을 제 것인 양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다 보니 무신론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인생이 무엇인지 알만한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칭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합니다. 아마 그들은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용기를 가졌든지, 아니면 인생이 무엇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제대로 몰라서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무신론자들은 충분히 조사해보지 않고도 신이 없다고 단정 짓는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우리는 아직도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 우주의 한 귀퉁이도 제대로 조사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아니 우주는 그만 두고 지구만 해도 너무 엄청나서 우리가 다 조사할 수 없는데 어떻게 신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정말 신이 없다고 주장하려면 전능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전능함이 필요하니까요.

현대 과학철학자들이 고전적 귀납주의를 비판할 때 백조의 예를 듭니다. 고전적 귀납주의를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한국의 백조는 희다. 미국의 백조도 희다. 남극에 있는 백조도 희다. 따라서 모든 백조는 희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현대 과학철학자들은 엄격한 귀납주의는 지구상의, 아니 우주의 모든 백조가 다 희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백조는 희다’라는 보편적 언명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 존재 증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없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나마 좀 이해할 수 있지만 신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보통 용기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의 하나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파스칼의 말과 같이 신이 있다고 했다가 없는 것은 밑져봤자 본전이지만 없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다가 신이 있음이 증명된다면 보통 낭패가 아닌 것입니다. 게다가 그 신이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자신도 잘 추스르지 못하는 신이라면 몰라도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창조주요 심판주인 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엄청난 위험 부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신이 없다고 주장하려면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한 대단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무신론자가 되려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엄청난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 우주를 초월하는 신이 없다는 것은 모든 가치와 판단의 궁극적인 근거가 오직 자신임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의식도 없는 물질세계가 그런 근거는 될 수 없으니까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무수한 문제들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책임지는 사람도, 해결자도 초월자가 아닌 자신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한정된 경험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매우 연약함을 압니다.

물론 무신론자들이라 해서 인간이 모든 문제를 스스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인간이 직면하는 본질적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 해결의 가능성 없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는 불치의 병고, 미구(未久)에 닥칠 죽음, 때로는 자식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기가 막힌 상황에서조차 오로지 자신만을 쳐다볼 수 있는 사람들의 용기. 그것은 분명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직면하는 여러 사건, 사고들은 조심하면 일어날 확률이 줄어든다고 해도 인생이 근원적으로 직면하는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합니까? 죄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불교적인 용어로 업(業)이라 해도 좋습니다. 인생의 모든 짐을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이 모두 지겠다, 혹은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실제로 짐을 질 수 있는가 와는 무관하게 그렇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경이로운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제가 정말 존경하는 것은 무신론자들이 자신의 소멸을 직면하는 용기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영혼이나 정신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다만 물질적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곧 죽음은 한 개체와 인격의 완전한 소멸을 의미합니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태어났더라도 의식할 수 없을 때 죽었다면 모를까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후에 영원에 잇대는 아무런 끈도, 대책도 없이 존재의 소멸을 직면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용기입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죽으면 열조들, 즉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고 믿었고,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도 죽은 후에 먼저 가신 조상님들을 뵐 것을 생각하면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자들은 무덤 저 너머 피안의 세계에 잇대어 있지도 않으면서 이 땅의 삶만으로 뭔가 의미와 보람을 찾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소멸되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담담하게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은 역전의 용사들보다, 어쩌면 순교자들보다 더 용감한 일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욕구, 존재의 영속에 대한 소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능인데 어떻게 그 본능이 없는 것처럼 담담할 수 있을까요? 무신론자들에게 존재의 소멸은 모든 삶의 블랙홀과 같은데...

세상에는 신앙을 위해, 신념을 위해, 때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영원에 대한 아무런 소망이 없이 존재의 소멸을 직면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소멸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신론자들, ‘신이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혹은 ‘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거야,’ 혹은 ‘아무래도 신은 없는 것 같아’라고 피할 여지를 남겨둔 무신론 “회색분자”가 아니라 신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는 리처드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용기를 가졌든지 아니면 시편 기자가 말 한 것처럼 어리석어서 그렇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시14:1, 53:1).

/글 양승훈 교수(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 www.view.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