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라울 훌리아(Raul Julia)가 주연하고 존 듀간이 감독한 영화 ‘오스카 로메로’ (Archbishop Oscar Romero)는 중미 엘 살바돌 대주교의 비극적인 일대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1917년 엘 살바돌 동부 산 미겔 지역의 바리오스에서 태어난 오스카 로메로. 소년시절 끌라라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수학하고, 37년에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산 살바돌대 신학과에 입학한다.

42년 성 뻬드로 대성전에서 사제로 서품된 뒤 귀국해서 산 미겔 교구의 교구장 비서로 임명됐다.

이후 23년 동안 교구 신문의 편집장, 주교좌 성당의 주임 신부, 신학교 교장 등의 소임을 받아 활동했다. 74년 산티아고 데 마리아 교구의 교구장 주교, 1977년 산 살바돌 대교구장이 됐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의 엘 살바돌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기를 겪는다. 군벌 움베르또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자 반대하는 정적들과 노동자,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 인권유린은 극에 달했다.

공공연한 사찰, 요인 납치, 암살, 그리고 저항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성품은 온화하지만 우유부단하고 세상물정 몰랐던 학구파 무명의 신부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기본신앙으로 갖고 있었다. 더욱이 정치에 개입하거나 해방신학을 주창하며 민중봉기를 선도할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비둘기파 신부가 돌변한 결정적 이유는, 동료 루띨리오 그란데 신부가 우익 민병대의 총에 죽은 모습을 보고 나서다. 싸늘한 주검 앞에서 할말을 잊은 그에게 쏟아졌던 일갈은 날선 비수 같았다.

“백성들의 탄식과 신음을 들으면서도 침묵하는 교회와 신부는 정권에 아부하는 창녀와 다름 아니다”.

대주교 로메로가 변한다. 억압과 착취를 부당한 것으로 지적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탄압과 폭력이 증가하자 주일 미사때마다 그 주에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항쟁하기 시작했다.

그에겐 혁명을 주도할 군대도 한자루의 총도 없었다. 다만 어떤 무기보다 더 강력한 용기라는 무기를 가지고 분연히 일어나 두려움과 싸우며 시작한 일이었다.

성당은 폐쇄되었고 미사는 중단되었다. 교회 시설은 군 막사로 사용되었다. 허름한 창고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외쳤다.

“천국은 사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죽음 저편뿐만 아니라 여기 땅 위에서도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의 교회를 이뤄야 합니다”.

“저는 자주 죽음의 위협을 느낍니다. 그러나 저를 죽일 때 저는 엘 살바돌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제가 흘린 피는 자유의 씨앗이 되고 희망의 신호가 될 것입니다. 저는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교회인 민중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억눌린 백성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 호소합니다. 명령합니다. 억압을 중단하십시오. 여러분이 죽이려는 노동자 농민은 여러분의 형제자매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악한 명령을 거부하십시오.”

80년 3월 산 살바돌 병원에 있는 채플에서 강론을 마치고 성찬식을 거행할 때, 난입한 무장괴한의 총에 살해당했다.

서슬퍼런 군부의 폭정에 비폭력, 무저항으로 자유의 씨앗이 된 오스카 로메로의 사상은 중남미 라티노들의 심장 속에 여전히 고동치며 살아있다.

대장정을 마치고 건국한지 232년, 노예제 폐지 후 143년, ‘나에겐 꿈이 있다’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연설한지 45년 만에 비로소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스와힐리어로 “신의 은총 받은 사람”란 뜻이 담긴 버락이, 부디 희망의 열매를 한아름 맺어 변화, 통합을 이루는 상생의 정치를 펴길 소망한다.

(추수감사절 사랑의 담요 나누기 참여: 703-622-2559 / 256-0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