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는 각자의 삶에 대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권리와 자유가 있지만, 이러한 자유주의 정신을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유럽중세시대의 종교적 광신성이 구교 (천주교 또는 카톨릭)에 의하여 저질러 졌고, 이러한 종교적 부패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진정한 종교의식과 생활을 실천하면서 일어선 신교 (즉 개신교 또는 기독교)가 작금에 와서는 한국이라는 조그만 사회에서 유럽중세시대의 카톨릭이 저지른 전횡적 부패를 고스란히 재현해내어, 남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강제하는 행위를 천국 가는 지름길인양 서슴치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 진정한 신앙인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하여 오늘도 우울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이 글은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기독교에 대해 열띤 토론 중에 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무엇이 됐던 대박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화가 그렇고 시사프로그램이 그렇습니다. 또 인터넷의 게시판 글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벌 때처럼 몰려 최고의 히트 수를 기록하며 갑론을박을 벌입니다. 내용의 공통적인 부분들은 대부분 기독교를 질타하고 문제점들을 성토하는 것들입니다. 요즘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근데 이런 글을 기독교인이 당해야 할 핍박의 길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 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시민의 강령을 말씀하시며 팔복의 마지막 부분에 ‘핍박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보면서 약간의 오해를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윤리나 질서, 도덕적 가치관들을 무시하고 단순히 신심만을 내세워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매일 성당 앞에 나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목이 떠져라 외친 한 여인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고, 수 없이 경찰의 주의를 받고 붙들려 가면서도 이것이 ‘핍박 받는 자’의 모습이기에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을 위안하는 모습을 보며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깊은 ‘핍박’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예수님은 팔복의 마지막을 ‘핍박’으로 장식하셨을까요 ? 이것은 앞서 말씀하신 다른 일곱 가지의 복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함을 통해 애통을 경험하게 되고, 예수님을 모신 마음에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이 득실 거리는 것이 마음 아파 살다 보면 자신이 온유하게 훈련되어진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더 적극적으로 주님의 의를 구하고 배우길 갈망합니다. 이렇게 채워진 의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할 줄 아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 청결한 마음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니 어딜 가나 평화를 만드는 '피스메이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역설적인 것은 세상은 이런 사람을 원하고 모두 그렇게 되길 바라지만 이런 사람에게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핍박인 것입니다. 왜 자신들이 그렇게 원하고 바라는 사람의 모습을 핍박할 까요? 그것은 자신들의 내면의 죄로 인한 치부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도록 미워한 이유는 단순한 이권이나 더 많은 청중들의 관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의 삶과 가르침이 그들의 마음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핍박은 ‘의를 위하여’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절에 그 ‘의’는 ‘나를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청중이 아닌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신앙을 위해 질서를 무시하는 혁명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천국 백성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앞서 제시한 일곱 가지의 복을 드러내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세상은 찔림을 받고 너를 핍박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면서 격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먼저 드러나야 할 천국 백성으로서의 일곱 가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서둘러 복음의 감격만을 전하다 보면 주님을 드러내기 보다 오히려 우리의 미숙함 때문에 복음이 가려지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핍박의 가치가 세상에 잘못 비쳐지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윤리는 이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진정한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을 세상에 보이며 살아갈 때 이미 세상은 압니다. 삶은 그렇지 못한데 입만 복음을 강조하는 것은 조급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전도하는 일에 아주 열심 있다는 분을 향해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치 경박한 졸부가 비싼 차를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 말이 곧 주님이 나에게 ‘나를 위해 기쁘게 받으라’고 하신 말씀일까요 ?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좀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 세워지기 위해 오는 ‘핍박’을 즐기며 살아가는 길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과 맺는 관계를 깨려고 덤비는 것들은 없습니까 ?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포기하거나 지지말고, 즐겁게 감당하며 더욱 천국을 소유한 백성답게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