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에서는 매일 새벽마다 매일 말씀 묵상집인 ‘생명의 삶’에 주어진 성경 말씀을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말씀에 담긴 소중한 의미들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요즘 7월에 들어서면서부터 묵상하는 말씀은 “아모스서”인데 아모스서를 생각하면 저는 신학교 다니던 시절이 생각이 나곤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신학교에 다니면서 유독 성경 말씀중 아모스서를 더 탐독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그러니까 19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닌 분들은 모두가 다 경험하셨겠지만 학생들의 대정부 데모로 제대로 공부한 날보다는 그렇지 못한 날들이 더 많았는데 더구나 제가 다니던 신학교는 당시 반정부 데모에 있어서 거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학교 중의 하나였기에 하루가 멀다 하고 데모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신학교에서 데모를 하려면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나서기 전에 우선 학생들이 모두 채플에 모여서 요즘 표현으로 하지만 소위 출정식을 겸한 기도회를 먼저 갖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회 때 봉독하는 성경말씀중 단골, 아니 거의 고정 메뉴가 바로 아모스서였습니다. 아마도 아모스서가 그렇게 데모하러 나가는 이들에게 애용(?)되었던 것은 그 내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모스는 예언자중에서도 “정의의 예언자”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아모스서 내용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우심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말씀들로 꽉 차 있는데 그 내용이 하도 서슬이 퍼래서 듣기 만해도 마음에 부담이 팍팍 오는 말씀들입니다. 당시 정부를 ‘부정과 부패, 독재와 탄압’의 힘이라 여기고 그와 같은 서슬이 퍼런 권력과 맞설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우심뿐이라는 생각에서 아모스서를 많이 인용했지 싶습니다.

이제는 신학교를 졸업한지도 30년이 훨씬 지날 만큼 세월도 바뀌고 바뀐 세월만큼이나 위정자들의 자세나 사람들의 정권에 대한 이해도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모스서를 대할 적마다 마음속에 스며드는 정의에 대한 열정과 무게는 세월의 변화 속에서도 여전합니다. 그래서인지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에 드리는 예배에서 아모스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묵상하며 이를 나누는 것이 새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이 주는 상쾌함이나 신선함과 함께 여전히 묵직한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아모스서를 다시 보면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그리고 주변 이방 국가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 관한 말씀중 제 눈에 크게 보이고 마음속에 깊숙이 다가온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시는 이유가 그들이 지은 서너 가지 죄 때문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아모스서 1장과 2장을 보면 여러 나라들을 지은 죄에 대해 징계하시는 이유가 바로 각 나라가 지은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라는 지적이며 이것이 계속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사람이 살면서 서너 가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벌을 내리시겠다는 말씀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두 순종하며 산다면 더 할 나위 없이 귀하겠지만 사람이 그렇게 살기가 쉽지가 않은 세상에서 삼사백 가지 죄를 지었다거나, 아니 삼사십 가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겨우 서너 가지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꽤 괜찮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고, 더구나 한 개인이 지은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 전체가 지은 죄를 지적하면서 한 나라가 서너 가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죄로 인한 벌을 내리시겠다는 것은 좀 심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닫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서너 가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좀 심하다고 여기게 된데에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 대한 신앙적 감각이 무디어지고 느슨해져서 마치 죄 불감증에 걸린 때문일 것입니다. 하도 세상에 죄가 만연되고 우리 생각과 생활 속에 죄에 둘려서 살다보니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서 이제는 웬만한 죄는 죄로 여기지도 않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속이는 사기 행각에 대한 보도를 들으면서도 누가 남의 돈 몇 백억 원을 가로챘다고 해야 사기 사건으로 여기지 남의 돈 몇 천원을 가로챈 정도로는 기사감도 되지 못하는 이 죄에 대한 불감증과 무감각한 현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신앙인들의 죄의식 속에도 깊숙이 파고들은 듯 합니다. 그리고 아예 죄에 대한 기준조차도 상대적이고 비교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 비교하고, 세상의 흐름에 따라 상대적인 기준치로 우리 스스로의 잘못을 합리화하곤 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아모스서를 통해 당신이 얼마나 죄에 대하여 진지한지를 다시 알려 주십니다. 죄는 한 가지를 지어도 죄로 볼 수 있는 믿음의 감각을 다시 되살리라고 알려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