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일 저녁, 최지훈 목사님의 송별 만찬에 많은 교우들께서 오셔서 석별의 정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분위기가 얼마나 따뜻하고 감동적이었는지요! 모든 순서가 끝난 후, 뒷정리를 하던 이현호 목사님이 “최목사님과 교우들 모두에게 깊은 치유의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라고 평했습니다. 정확한 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여러 분들이 지적하신 것처럼, 최 목사님이 남긴 가장 강한 인상은 ‘신실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진실하려고 했고,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려 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꼭 이루는 사람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허튼 말이 없는 사람, 말 자체가 보증 수표인 사람, 겉으로 표현된 말과 감추어진 마음 사이에 간격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분에게도 더 성장해야 할 분야가 없지 않습니다. 특히 목회의 효율성 문제에 있어서 더 많은 발전이 필요합니다. 본인도 그런 필요성을 느꼈기에 담임 목사의 자리로 옮겨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하여 지난 며칠 동안 신실성과 효율성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한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어느 면을 더 중하게 보실까? 목회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했느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얼마나 신실했느냐, 얼마나 정직했느냐, 얼마나 진실했느냐, 얼마나 참되게 살았느냐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관심은 정반대입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는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를 묻습니다. 효율성이 높은 정도에 따라서 연봉도 올라갑니다. 그런 사람을 ‘성공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효율성을 잡기 위해 신실성을 희생시키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술수를 사용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불의를 행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성공의 길처럼 오해합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신실성을 포기하라는 유혹을, 목회자들은 매일 직면하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은 시험이 실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실성을 포기하고 악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커다란 업적을 만들어 내라고 예수님을 유혹했습니다.

물론, 신실성과 효율성이 언제나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닙니다. 신실하게 살아가면서도 좋은 결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최 목사님이 크게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신실성은 부족하면서 효율성이 높은 목회자들을 생각할 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최 목사님은 빼어난 사람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제 스스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실함을 중히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나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얼마 전, 조영진 감리사님께서 책을 한 권 선물해 주시면서, “목사님의 신실하고 효율적인 목회에 감사드립니다.” 라고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도 내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사람처럼 보일까? 혹시, 나는 신실성보다 효율성에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으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주님의 자비만을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