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 가면 위튼 칼리지(Wheaton College)라고 하는 명문 기독교 대학이 있습니다. 그 대학 건물 가운데 브랭카드 홀이 있는데, 그 건물 2층에는 그 학교에서 배출된 선교사들의 명단과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많은 사진 가운데 보면 십자가가 붙어있는 사진들이 있는데, 그 선교사는 선교사역중 순교했다는 표시입니다.

그 학교 출신으로 선교지에서 순교한 선교사 중에 제임스 윌리어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남미 에콰도르의 이오카 인디언 부족에게 선교하다가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한 기독교 잡지사 기자가 윌리어트 선교사의 부인에게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때 부인은 "말씀을 삼가 주십시오. 비극이라니요? 제 남편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그 곳에 갔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 위해 그 땅에 갔던 것입니다" 하고 대답을 하면서 남편이 위튼 대학을 다닐 때 썼던 큐티 노트 한 부분을 공개했습니다. "결국은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코 놓칠 수 없는 것도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코 놓칠 수 없는 것도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 것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그 무엇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젊음은 지나가는 것이다. 명성도, 자기만족과 쾌락도, 그리고 물질도 결국은 붙들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오 하나님! 오래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옵소서!"

결국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고, 결코 놓칠 수 없는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고, 영원할 수 없는 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살든지 인생의 기회는 한번뿐입니다. 영혼을 위하여 사느냐, 육신을 위해 사느냐에 따라 영원한 삶과 영원하지 않은 삶이 결정됩니다.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는 육신의 생명이 있을 동안에 만들어야 합니다. 육신의 목숨보전을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끝까지 지킬 수가 없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 모든 시간이 소모되고 끝내는 낡아버린 육신을 땅에 묻어 한줌의 흙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제한된 수명을 살아야 하는 육신의 삶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기업인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영적 존재로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 기업인의 삶에 서도 구현되어야 합니다. 영리가 목적인 기업 활동일지라도 이익의 극대화보다 신용과 정직과 성실이라는 정신적 영적 가치가 더 중요시 되어야 하고, 이익이 포기 될지라도 영적 가치가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기업의 성장이 인류복지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일 때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가치의 보존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정치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포기할 수 있는 것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분명하거나, 결심이 서 있지 않다면 이미 자격상실자요, 삶의 의미조차 상실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권력에 의한 개인의 영달과 소속집단(정치세력)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국민과 국가의 이익과 미래를 위한 헌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불행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도자는 권모술수에 앞서 혜안과 선견지명을 갖고, 야망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복음에 대한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로마를 향했던 사도바울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분야에서 사명을 감당하든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한번뿐인 삶을 불태울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 육신의 생명을 포기했던 제임스 윌리어트 선교사처럼,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런 영원한 가치는 이 땅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