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우리 교회 사역자 중의 한 분을 며칠 만에 만났는데, 유난히 얼굴이 야위어 보였습니다. 웬일인가 여쭈었더니 현재 진행중인 우리 교회 40일 신년 저녁 기도회동안 매일 두 끼씩 금식을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늘 감기로 고생하는데 무슨 두 끼씩이나 금식을 하느냐고 했지만, 꼭 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인가 했더니,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서로 화평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기도제목이긴 하지만, 건강도 중요하니까 한 끼만 금식하라고 거의 명령에 가깝게 권했는데도, 평소, 제 말이라면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순종하겠다는 자세로 사역에 임하시는 그 분이 이번에는 조용히 머리를 흔드시었습니다. 자기 몸을 부스듯 기도하는 그 기도의 희생은 벌써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불화하던 관계가 기적같이 회복되어가는 모습들이 이따금씩 눈에 뜨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될 때, 더 강하게 임하시는지, 지난 금요 영성 예배시에는, 평소와 다르게 운행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축복된 시간을 가졌습니다.

화평을 위하여 금식하는 그 사역자를 대하며, 지금은 천국 가신 제가 존경하는 두 권사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시어머님은, 자식들의 가정의 화평을 위하여 늘 기도하시던 기도의 용사이셨습니다.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두 아들의 가정에 잠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어머님은 단식 투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가정들에 화평이 회복될 때까지 무기한 금식을 선포하신 후 아예 자리에 누우셨습니다. 노쇠하신 어머님이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계신 그 모습에 잠시 방황하던 아들들은 손을 들었습니다. 결국 다들 화평을 회복하여 지금은 아주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며 잘 살고 계십니다. 또 한 분은 저를 전도하신 저의 영적인 어머니이신, 고 김 경환 권사님이신데, 그 분 역시 늘 화평을 위하여 기도하시던 기도의 용사이시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살던 동네의 한인회에 큰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 권사님은 근심하던 중, 3일 금식을 단행하셨습니다. 70을 바라보는 연로한 육체로 3일 금식을 마치신 후, 갈등의 장본인이 되는 두 지도자를 당신 댁으로 부르셨습니다. 저도 마침 그 때 그 댁에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나지막한 음성으로 권사님이 무엇인가 말씀하셨는데, 두 건장한 장정들이 무릎을 꿇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극적인 화해가 이루어졌고 그 시골 동네에는 다시 단란한 평화가 흐르기 시작했었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 여론 조사에서, 인간이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압도적인 답은 ‘평화’ 였다고 합니다. 과연 평화는 우리 모두의 열망입니다. 그런데 평화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장미를 품을 때, 가시도 품어야 하는 것처럼, 화평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아픔과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어느 전선에서 통신병이 중요한 연락 사항을 명령 받았는데 모든 통신 수단이 두절되었습니다. 길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끊어진 전선을 연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통신병은 끊어진 양쪽의 전선을 자기 양 손으로 붙잡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숨진 통신병은 자기 생명을 희생하여 메시지를 아군의 지원부대로 보내었고 아군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평을 위하여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고난과 같은 고난의 본입니다. 성경은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니 화평케 하는 자가 얼마나 귀한지 시일이 흐를수록 깨닫습니다. 목사인 인간의 마음에도 이렇게 귀한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얼마나 더 귀할까요? 자기를 희생하면서라도 화평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분들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낍니다. 우리 모두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한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이웃,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