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무엘상 19장 1절 - 7절
사울 왕의 미움과 적대 행위에 고통을 당해야 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아주 귀한 돕는 자를 붙여주셨습니다. 바로 사울 왕의 아들과 딸입니다.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과 딸 미갈은 다윗에게는 아주 귀중한 돕는 자였습니다. 특히 요나단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울 왕에게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며 만류합니다. 아버지에게서 예기치 못할 무서운 징계를 당할 각오를 하고 요나단은 사울 왕에게 다윗과 화해할 것을 호소합니다. 요나단의 노력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사울 왕에게서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맹세를 얻어냅니다. 하지만 이 맹세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맹세인지를 우리는 금세 알게 됩니다. 사람의 맹세라는 것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때로는 나라와 나라가 서로 맺는 국제적인 결정이나 조약들도 한갓 휴지조각이 되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자신의 약속이나 맹세를 깨더라도 우리는 놀라지 않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설득으로 다시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자, 사울 왕의 뒤틀린 마음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끝까지 사울 왕을 충심으로 섬겼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왕을 섬겼습니다. 이에 대한 사울 왕의 반응은 참으로 비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하는 모든 선한 일을 그는 악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하는 모든 희생과 헌신을 그는 의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다윗은 악한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그 일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선한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심지어 여전히 사울 왕을 위해 수금을 타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도 그 일을 하다가 위험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사울 왕을 위한 일이라면 다윗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다윗은 또 다시 위험에 처합니다. 수금을 타던 다윗을 향해 사울 왕이 창을 던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 앞을 피하여 즉시 집으로 피신합니다. 다윗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팔을 우리는 순간순간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 34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방패와 요새시요, 산성과 반석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능력을 시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시험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 왕 앞에서 즉시 피했습니다.
다윗이 집으로 도망한 것을 안 사울 왕은 즉시 다윗의 집으로 군사를 보냅니다. 그를 지키고 있다가 아침에 그를 잡아 죽이라는 명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 때에도 하나님은 돕는 자를 보내십니다. 바로 사울 왕의 딸 미갈입니다. 그는 영리한 꾀를 써서 다윗을 몰래 집 바깥으로 보냅니다. 그리고는 아침까지 군사들을 붙잡아 둡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결국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자기에게 기름을 붓고 왕이 되리라고 예언한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당한 모든 일들을 사무엘 선지자에게 고합니다. 이를 통해 사무엘 선지자에게서 위로를 얻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다시 사울 왕에게 알려집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잡기 위해 사무엘 선지자가 머물고 있는 나욧으로 군사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보낸 사람들마다 황홀한 영적 체험을 하고 돌아옵니다. 도무지 다윗을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울 자신이 다윗을 잡기 위해 나섭니다. 하지만 사울 역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또 다시 사울 왕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주변에는 돕는 자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요나단의 도움은 다윗에게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가 다윗을 이처럼 도왔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요나단과 다윗은 어떤 면에서는 라이벌일 수도 있었습니다. 왕위를 놓고 싸울 수도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성경은 요나단이 다윗을 마치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사랑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인 사랑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그랬습니다. 요나단과 다윗 사이의 놀라운 우정의 비밀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다양합니다. 한때 마틴 부버라는 유태인 학자가 이를 분석해서 내 놓은 말이 유행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세 가지라는 겁니다. 첫째는 그것과 그것과의 관계입니다.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일종의 물질로 전락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서로를 이용하다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으면 서로 버리는 관계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이 헤어집니다. 둘째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입니다. 나는 끝까지 상대방을 인격으로 대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끝까지 나를 물질로 다룹니다. 나는 끝까지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인격으로 대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이용할 만큼 이용하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사람으로, 인격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진실함으로 대하고, 사랑으로 대하고, 생명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나와 너의 관계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어떤 작은 일로 인해 이 나와 너의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계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 이 관계를 발전시키고, 깊게 하고, 영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할 어떤 중매자가 필요한 데 이를 영원한 너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인과 교인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것과 그것의 관계가 있습니다. 서로 이용합니다.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으면 관계는 사라집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대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끝까지 이용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면 관계는 끊어지고 맙니다. 나와 너의 관계가 있습니다. 첨에는 마치 속이라도 다 내 줄 듯이 친합니다. 하지만 이게 오래 가질 않습니다. 이게 오래 가려면 요나단과 다윗처럼 “나와 너 사이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셔야” 가능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핏줄이 같다고 해서, 태어나고 자라난 지방이 같다고 해서, 같은 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혹은 같은 경험과 체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갖는 인간관계는 금세 불이 붙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속적인 관계는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여야 합니다. 나와 너 사이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기도로 이어지고, 예배로 이어지고, 함께 교회를 섬김으로 이어지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눔으로써 이어지는 그런 믿음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관계는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하늘나라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깊고 영원한 우정과 사귐이 오늘 우리 교회에 항상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윗과 요나단 같은 하나님이 가운데 계시는 믿음의 친구, 영원한 친구가 항상 여러분 곁에 계시길 축원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절대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혹 그런 친구가 없습니까? 왜 없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십니다.
사울 왕의 미움과 적대 행위에 고통을 당해야 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아주 귀한 돕는 자를 붙여주셨습니다. 바로 사울 왕의 아들과 딸입니다.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과 딸 미갈은 다윗에게는 아주 귀중한 돕는 자였습니다. 특히 요나단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울 왕에게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며 만류합니다. 아버지에게서 예기치 못할 무서운 징계를 당할 각오를 하고 요나단은 사울 왕에게 다윗과 화해할 것을 호소합니다. 요나단의 노력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사울 왕에게서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맹세를 얻어냅니다. 하지만 이 맹세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맹세인지를 우리는 금세 알게 됩니다. 사람의 맹세라는 것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때로는 나라와 나라가 서로 맺는 국제적인 결정이나 조약들도 한갓 휴지조각이 되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자신의 약속이나 맹세를 깨더라도 우리는 놀라지 않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설득으로 다시 왕궁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자, 사울 왕의 뒤틀린 마음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끝까지 사울 왕을 충심으로 섬겼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왕을 섬겼습니다. 이에 대한 사울 왕의 반응은 참으로 비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하는 모든 선한 일을 그는 악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하는 모든 희생과 헌신을 그는 의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다윗은 악한 대접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그 일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선한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심지어 여전히 사울 왕을 위해 수금을 타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도 그 일을 하다가 위험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사울 왕을 위한 일이라면 다윗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다윗은 또 다시 위험에 처합니다. 수금을 타던 다윗을 향해 사울 왕이 창을 던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 앞을 피하여 즉시 집으로 피신합니다. 다윗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팔을 우리는 순간순간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 34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방패와 요새시요, 산성과 반석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능력을 시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시험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 왕 앞에서 즉시 피했습니다.
다윗이 집으로 도망한 것을 안 사울 왕은 즉시 다윗의 집으로 군사를 보냅니다. 그를 지키고 있다가 아침에 그를 잡아 죽이라는 명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 때에도 하나님은 돕는 자를 보내십니다. 바로 사울 왕의 딸 미갈입니다. 그는 영리한 꾀를 써서 다윗을 몰래 집 바깥으로 보냅니다. 그리고는 아침까지 군사들을 붙잡아 둡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결국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자기에게 기름을 붓고 왕이 되리라고 예언한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당한 모든 일들을 사무엘 선지자에게 고합니다. 이를 통해 사무엘 선지자에게서 위로를 얻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다시 사울 왕에게 알려집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잡기 위해 사무엘 선지자가 머물고 있는 나욧으로 군사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보낸 사람들마다 황홀한 영적 체험을 하고 돌아옵니다. 도무지 다윗을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울 자신이 다윗을 잡기 위해 나섭니다. 하지만 사울 역시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또 다시 사울 왕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주변에는 돕는 자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요나단의 도움은 다윗에게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가 다윗을 이처럼 도왔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요나단과 다윗은 어떤 면에서는 라이벌일 수도 있었습니다. 왕위를 놓고 싸울 수도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성경은 요나단이 다윗을 마치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사랑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인 사랑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그랬습니다. 요나단과 다윗 사이의 놀라운 우정의 비밀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다양합니다. 한때 마틴 부버라는 유태인 학자가 이를 분석해서 내 놓은 말이 유행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세 가지라는 겁니다. 첫째는 그것과 그것과의 관계입니다.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일종의 물질로 전락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서로를 이용하다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으면 서로 버리는 관계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이 헤어집니다. 둘째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입니다. 나는 끝까지 상대방을 인격으로 대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끝까지 나를 물질로 다룹니다. 나는 끝까지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인격으로 대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이용할 만큼 이용하다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사람으로, 인격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진실함으로 대하고, 사랑으로 대하고, 생명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나와 너의 관계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어떤 작은 일로 인해 이 나와 너의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계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 이 관계를 발전시키고, 깊게 하고, 영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할 어떤 중매자가 필요한 데 이를 영원한 너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인과 교인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것과 그것의 관계가 있습니다. 서로 이용합니다.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으면 관계는 사라집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대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끝까지 이용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면 관계는 끊어지고 맙니다. 나와 너의 관계가 있습니다. 첨에는 마치 속이라도 다 내 줄 듯이 친합니다. 하지만 이게 오래 가질 않습니다. 이게 오래 가려면 요나단과 다윗처럼 “나와 너 사이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계셔야” 가능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핏줄이 같다고 해서, 태어나고 자라난 지방이 같다고 해서, 같은 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혹은 같은 경험과 체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갖는 인간관계는 금세 불이 붙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속적인 관계는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관계는 믿음의 관계여야 합니다. 나와 너 사이에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기도로 이어지고, 예배로 이어지고, 함께 교회를 섬김으로 이어지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눔으로써 이어지는 그런 믿음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관계는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하늘나라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깊고 영원한 우정과 사귐이 오늘 우리 교회에 항상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윗과 요나단 같은 하나님이 가운데 계시는 믿음의 친구, 영원한 친구가 항상 여러분 곁에 계시길 축원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절대로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혹 그런 친구가 없습니까? 왜 없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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