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무엘상 18장 20절 - 30절

다윗에게 맏딸 메랍을 주어 사위를 삼겠다고 했지만 결국 사울 왕은 맏딸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사울 왕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은 할 수 없이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 신하들을 시켜 다윗에게 자기 말을 전하도록 명합니다. 결국 사울의 신하들이 다윗을 찾아가 말합니다.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지만 이러한 신하들의 말에 다윗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경한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로라.” 다윗의 말처럼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가문도 좋아야 하고 재산도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사울 왕은 신하들을 시켜 다윗에게 이렇게 말을 전합니다. “왕이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하고...” 여기 나오는 폐백은 일종의 결혼 지참금을 뜻합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입니다.

실제로 동양에서는 신부 측 부모 입장에서 딸을 출가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집안의 노동력을 잃는 셈이었습니다. 시집가기 전 딸들은 집안의 가축을 돌보고, 들에서 일을 하고, 여러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일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딸이 시집을 가면 신부 측 입장에서는 일손이 줄어드는 것이요, 신랑 측 입장에서는 일손이 늘어나는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신랑은 신부 측에 어느 정도 그에 맞는 보상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 보상이 바로 폐백이었습니다. 결혼 지참금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참금은 꼭 돈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노동으로도 갚을 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야곱에게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년을 봉사하리이다.”라고 제안했습니다. 야곱에게 결혼 지참금은 7년의 노동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이 결혼하기 위해서는 지참금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인데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될 수 있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그렇게도 큰 명예로 생각했는데,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데 이 얼마나 큰 명예인가? 우리가 누구인데 이런 존귀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 들이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권세입니다. 천사도 부러워했던 특권입니다. 우리는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다윗처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믿기 힘든 특권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인데...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이 말을 전해들은 사울 왕이 숨기고 있었던 악한 계획을 이야기해줍니다. “다윗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 나는 결혼 지참금으로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 다만,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이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너를 사위로 맞이하겠다...단, 죽이되 그들이 블레셋 사람이라는 증거로 그들의 양피를 베어 오너라.”사울 왕의 계획은 참으로 간교하였습니다. 할례를 거부하고 있던 블레셋 사람들에게 양피를 베는 것은 참기 힘든 모욕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죽은 블레셋 사람들의 양피를 베어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블레셋 인들은 더욱 크게 분노해서 어떻게든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이것이 사울 왕의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다윗은 결국 사울 왕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는 백 명이 아니라 2백 명의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양피를 베어 사울 왕에게 바칩니다. 이로써 사울 왕은 그의 막내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어 그를 사위로 삼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 사울 왕이 분명히 깨달은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28절과 29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하지만 이 말씀은 사실 앞에서도 여러 번 나왔던 말씀입니다. 12절에서도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또 14절에서도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사울은 반복해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또 봅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합니다. 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알게 되면 그를 두려워합니다. 아비멜렉 왕의 군을 이끌고 있는 장군이 아브라함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창 21:22).” 거대한 군사를 이끌고 있는 장군이 작은 식솔을 거느리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애굽의 고위관리였던 보디발은 요셉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보디발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우리 스스로는 잘 깨닫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압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특별한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더라도 이방인들은 알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방인들이 우리에게서 그런 축복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 부끄러울 것입니다.

사울이 왜 다윗을 두려워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보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셨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힘과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지혜도 사라지고 신중함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정작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그가 죄를 짓고 난 후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3-11).”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당할까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거두어 가실까봐 다윗은 두려워하며 회개합니다. 하지만 사울에게서는 이런 기도를 들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다시 힘을 얻습니다. 용기를 갖습니다. 지혜를 회복하고 신중해집니다. 오늘 우리에게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고 아는 그런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복임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