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영광교회 김병규 목사
(Photo : 기독일보) 주님의 영광교회 김병규 목사

오늘의 세대가 악해서 인지 사람들의 대화 속에 정의와 공의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봅니다. 정의는 기준을 말함과 동시에 공정한 것을 말합니다. 누가 보던지 보지 않던지 신호등을 잘 지키는 것이 정의입니다. 반면에 공의는 살리는 것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잘하는 일을 뜻합니다. 응급환자가 있습니다. 이때는 신호 지키는 정의보다 생명 우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호를 어기고라고 병원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그러나 이 둘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순간 잘못하면 한쪽에 기울어지기가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공의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기준을 지키는 것이 정의요, 살리는 것이 공의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믿음이 생기면, 믿음의 눈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의 영광을 보시고. 우리 속의 가치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겨짐이라는 오염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탕자는 망가져도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신분과 가치는 변함이 없듯이, 우리는 영광을 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칭찬할 때도 사람의 영광과 가치를 보고 인정하는 칭찬과 격려를 해야 합니다. 맨날 약속 어기는 사람을 향해 나는 너의 성실을 본다고 한다면, 이것은 조롱과 비웃음이지만, 내가 당신을 보니, 성실의 진수가 보인다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말할 때 이것이 바른 칭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준과 공정을 잃지 않는 정의로 우신 분이시기에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있어서는 결코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정의와 공의의 구분이 쉽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좋은 것만 보시고. 좋게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영광을 보는 눈이 하나님의 눈이요. 가치를 만들어 주는 눈이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선악과 인생을 벗어나야 합니다, 평생을 옳고 그름, 내 편과 네 편,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고 살았다면, 내가 기준이 되고, 내가 하나님 되는 교만한 인생을 산겁니다, 그러나 영광을 보는 인생을 살게 되면 사랑의 능력이 살아나게 되고 너와 나 구별이 없이 다 같이 살아나는 일들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명작이라 일컫는 마지막 잎새의 작가 오 헨리가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였습니다.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횡령 혐의로 3년 3개월 복역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서 좋은 간수를 만났습니다. 신앙의 표본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그 간수의 이름이 오 헨리였습니다. 포터는 그 간수의 아름다운 삶을 보았습니다.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개명해 버렸습니다. 그 이후 나온 모든 작품들이 다 오 헨리의 이름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지금부터는 시드니 포터는 죽고, 오 헨리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사람 속의 영광을 보는 눈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