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영광교회 김병규 목사
(Photo : 기독일보) 시애틀 영광교회 김병규 목사

보통 사람의 체중의 5%가 혈액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3리터 정도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1.5리터의 피가 빠지게 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합니다. 1.5리터는 우리가 자주 보는 페트병 정도 피가 빠지면 사람이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빨리 출혈 조치를 하지 못하게 되면 죽는다는 말이 됩니다. 즉, 이 핑계, 저 핑계로 시간 끌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증 외상 환자 중에 부자들은 아는 연줄 통해 치료 받는데. 가난한 사람은 힘이 없어 병원도 갈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돈의 유무로 생명을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이건 정의가 아닙니다. 이종국 교수가 이를 질책하니 동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의 험한 직설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의 희생 때문이라 합니다. 그는 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한가한 저녁이 있는 삶을 비웃을 정도의 바쁜 삶을 보낸다 합니다. 1년에 몇 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삶을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런 사명감으로 뭉친 수십 명의 팀원이 존재한다 합니다. 그들 때문에 죽을 생명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의 배타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희생이 있기에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에도 배타성이 있습니다. 복음에는 분명히 너는 틀렸고, 이것만이 옳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 된 인간에게는, 예수라는 이름 외에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 없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 외 다른 종교에는 전혀 구원이 없다는 배태성이 강한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접한 사람들을 싫어하고 핍박을 하는 겁니다, 저항과 불쾌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반해서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사랑을 보여주면 더 미워할 수 없게 됩니다. 희생적 사랑을 보이면, 분노의 불길은 꺼져 버린다는 겁니다. 희생의 고마움에 마음을 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복음의 배타성은 저항을 낳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희생으로 포장해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저항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가슴 속에 녹아들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스데반의 메시지에 당시에 사람들은 분노합니다. 복음의 배타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어가면서 드린 용서의 기도가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듭니다. 기억하고 명심해야 합니다. 뭘 말하고 싶으면? 명확한 논리가 있는가? 와 올바른 정의가 있는가? 와 희생 없이 주장하는 정의는 헛될 뿐입니다. 옳은 말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희생 없는 웅변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항감만 불러올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완성된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예수가 복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옳아도 희생 없는 증거는 힘이 없습니다. 희생하면서 말하고. 피를 흘리면서 외쳐야 합니다. 그것이 증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