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박사
(Photo : 기독일보) 김재성 박사

교회성장학은 개혁주의 신학이 그렇게 비판해 온 로마 가톨릭 교회의 "행위 중심의 교회" 이론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시장 경제가 주도하고 있는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는 목회 성공은 물질적으로 화려한 포장을 하고 있다. 그러한 사회환경에서는 황금만능주의를 벗어날 길이 없다. 전 국민을 각 지역 교회에 출석하게 했던 로마 가톨릭 교회야말로, 목회성장학으로 볼 때에, 가장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까?

현대교회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처해있다. 새로운 교회성장을 염원하는 입장에서 여러 가지 방안들을 모색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교회를 살려내려는 동기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감한다.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양식은 급속히 변모하였고, 한국 사회는 짧은 기간 안에 수백 여년 간 지탱해 온 모든 요소들을 잃어버렸다. 물질 만능주의가 세상을 바꿔놓았다. 영국을 비롯해서 서구 유럽에서는 19세기에 산업혁명으로 기계화가 이뤄지면서, 세계 산업구조가 농업중심에서 상업과 대량 생산방식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노동집약적인 산업들이 등장하면서, 도시화가 확산되었다. 뉴욕 등 세계 주요 도시들은 주식시장과 자본금을 놓고서 거래하는 새로운 형태의 대주주들을 양산했다. 동시에 자본을 소유한 자들은 합법적으로 시장 경제의 가속화와 더불어서 천문학적인 물자를 소비케 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했다. 세계적으로 교역량이 증가하였고, 모든 생산품은 그 수량과 질에 있어서 무한 경쟁 상태로 내몰렸다. 자동차나 비행기나 기차와 선박 등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기술문명의 진보가 진행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성경의 가르침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구하는 사회의 변화는 제3 세계 개발도상국에서 더욱더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농업사회에서 도시 문화로 진입한 후에, 도시 교회들의 주도가 나타났다.

교회를 병들게 만든 것은 물질 만능주의만이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는 교회와 대결하는 수많은 종교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기독교의 유일성에 반기를 드는 종교 다원주의(pluralism)는 기독교 복음의 절대성을 훼손하고 말았다. 종교 간에 평화를 도모하는 대화모임에서는 종교 상대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모든 종교는 동일하다는 생각이 새로운 시대적 풍조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각 교단이나 교파를 벗어나서 초교파주의 현상들이 늘어났다. 안타깝게도 예배 중에 선포되는 설교 시간도 짧아졌다. 말씀의 권위는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으며, 쉽게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신이 회원으로 속한 하나의 지역 교회에 헌신하고 봉사하려는 성도들이 줄어들어 버렸다.

지금 한국에서는 마치 교회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기지처럼 혐오 기관이 되고 말았다. 수많은 교회가 사람들의 생활 공간에 함께 자리하고 있지만, 과히 중요한 곳으로 취급되지 않고 있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정한 예배와 각종 기도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생활의 중심에 두고 살아갔다. 필자의 부모님 세대들은 매일같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을 필수적인 삶의 의무로 간주했었고, 교회가 제일 우선이요 최고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일상이 바빠진 현대인들은 주일 날 오전 예배 시간마저도 출석하지 않은 채,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하면서, 교회에 출석하는 집회가 무지한 자들이 비과학적인 맹신에 매달리는 것으로 매도되고 있다. 이처럼, 교회 주변에서의 인식의 변화가 엄청나다.

현대인들의 문화에 따라서, 가치관이 엄청나게 변했다. 과거와 달리, 예배 요소와 순서들, 찬양 시간의 음악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방법을 개발해서 바꾸는 것만으로는 과연 올바른 교회가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다. 이제는 중요한 기관이자 선진적인 제도를 갖춘 교회가 성도들에게 주었던 혜택들을 잊어버린지 오래되었고, 존재 의미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현상들이 현대 목회자들의 설교와 가르침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모든 것들이 현대 교회의 쇠퇴에 작용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현대인들에게 맞는 교회 성장론이 나온 것이라고 본다. 성공적인 목회론, 혹은 목회 성장학이라는 "과목"을 설정하자, 수많은 목회자들이 모여들었다. 대형교회마다 교회성장학 세미나를 열었고, 목회성공의 비결들을 제공하는 강좌들이 넘쳐났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성장 세미나는 양적인 확장과 교세팽창으로 치중하고 말았다. 더구나 이들 강좌들에서 제공하는 "세속화된 방법론"들이 소개되면서, 교회론의 변질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재벌들이 유명한 가문으로 등장했다. 현대인들은 문화적 가치들을 돈과 권세와 명예와 인기 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계에서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대형교회가 마치 재벌그룹처럼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란 돈이 많거나, 매스컴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가 되거나, 혹은 인기가 높은 사람을 의미한다. 교회 성장의 환상을 쫓아가는 목회자들도 역시 이러한 부류의 한 가지에 매달리게 되었다. 성공한 사람들이 모이는 서울 강남지역의 교회들은 마치 "탑 브랜드 아파트"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목회성공의 신드룸이 낳은 폐해는 세속화 현상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성공한 사람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 유명한 일류 학교를 졸업하고 거대한 재벌 그룹 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는 고위 직책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렇듯이, 성공한 목회자들의 행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울 강남의 어떤 대형교회 목회자는 영국제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러한 것이 과연 목회자로서 성공한 것이라고 말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그저 다 "나에게 오라"고 부르시지 않았던가? 하나님께서는 주일 오전 예배 시간에 몇 명이나 출석하는 곳에 다니느냐고 묻지는 않으신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진실한 성경의 교훈은 제쳐두고, 목회성공은 무엇을 내세우고 있는가? 교회 성장학이 빚어낸 왜곡된 인식은 세속화된 가치평가로 목회자와 교회를 미혹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겉으로 보여주기 식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들과 사역들이 나열되었다. 외적으로 포장하기를 즐겨하는 교회론의 변질이 초래된 것이다. 현대교회는 찬송을 회중들의 다 함께 노래 부르기로 바꿨다.

교회의 찬양은 하나님께 올리는 곡조 붙은 기도가 아니라, 현대 음악적인 유희와 다를 바 없게 사람들의 심리적 위로에만 치우치고 말았다. 찬양은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나오도록 유도하는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송가나 현대 찬송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찬양의 초점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고, 존경과 경배를 올리는 용도로 사용되어지고 있느냐를 묻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과 본질에 대해서 성경이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되돌아 보아야 한다. 교회는 정체되어서는 안되지만,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도 안된다. 교회는 영원한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진리를 제시하는 곳이다. 유대인의 문화와 전통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주후 1세기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어느 곳에서나 어느 종족이라도 교회로 받아들였다. 교회란 인간의 문화 속에 하늘의 성품과 인격이 담겨지게 된 것이다. 교회는 모두 다 항상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속성들과 특성들을 공유한다.

한국교회에서나 해외 교회에서나, 우리는 슬프게도 수많은 목회성장의 어두운 면들을 목격하고 있다. 교회의 지침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게 되면, 결국 사람의 허망한 욕심에 빠지게 되며, 죄가 장성하게 되고, 마침내 사망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급속한 기업의 성장과 국력의 신장에 힘입어서 양적으로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서울에는 초대형 교회들이 속속 들어섰다. 마치 대기업으로 자리잡은 몇몇 재벌 그룹들처럼, 초대형 교회들은 교세 확장을 도모했다. 여의도의 모 교회는 은사운동으로 각광을 받았고, 강남 신사동의 모 감리교회는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유도했다. 이런 교회들을 모아서 "한국의 10대 교회"라는 책이 나왔는데, 지금은 어떻게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10대 교회"가 잘못된 용어이듯이, 지난 세대에는 "복음주의 4인방"이라는 이름의 목회자들이 기독교 언론의 주목을 받았었다. 여기에 거명된 네 분 모두 다 특별한 헌신과 지도력을 발휘했던 분들이었고, 존경을 받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4인방"이라는 특정한 중심인물을 그룹화하는 것은 중국에서 공산주의 정치가들을 특정 계급으로 추켜세우고자 부르는 호칭이 아니었던가? 서울에서 대형교회를 개척하였고, 공헌을 하신 분들이야 아무런 잘못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부르는 언론이나, 교계의 행태가 한심할 따름이다. "4인방"이라니 도무지 기독교의 정신과는 상관이 없는 말이요, 전혀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다. 어째서 이런 개념이 널리 펴져나갔던지,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 언론이나 단체들이 목회 일선에서 헌신하는 모든 헌신자들을 존중하려고 한다면, 결코 사용해서는 안될 용어였다. 지금도 "차세대 4인방"을 또 다시 만들어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이러다 보니, 지극히 세속적인 교회성장론이 한국교회에 유행하게 되었고, 결국 내실에 치중하지 못한 채 대규모 예배당 채우기에 바쁜 나날들이었다. 치밀하게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지도하지 못하였고, 부실한 기독교인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수없이 많은 혼란을 가증시킨 이단들이 성도들에게 미래의 성공과 건강, 출세와 인기 등을 마치 마약과 같이 퍼트렸고, 그 폐해가 지금도 남아있다. 가짜 복음과 불건전한 사이비 유사 기독교 사상들이 퍼져나가서 정통교회가 치명상을 입었는데, 한국 대형교회들은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목회자들은 모두 다 대형교회를 목표의 성과물로 설정하였고, 그런 성공한 사업가 이미지를 갖춘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전국 규모의 교회 연합단체에서 대표회장을 맡도록 해야한다는 식으로 호도했다. 대형교회 목회자가 마치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들이 펼쳐지던 동안에, 민주화의 희생자들이 늘어났으며, 분단 조국의 양극화가 촉진되었다. 이처럼 지난 세대 초고속으로 성장한 한국교회는 허술한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는 인격적 목회와 선교적인 명령수행, 전도에 강조를 두는 것을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는 입장으로 수행해야만 한다. 복음이 전파되어서 회개를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형성되고, 총체적인 인격의 변화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그냥 교회 안에 사람들만 많이 모이도록 해서는 결코 부흥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참된 교회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