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A대표 강순영 목사
(Photo : ) JAMA대표 강순영 목사

"우리가 웨일스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서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Gorge M. McCune선교사의 선교보고 중에서-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 입니다. 매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이  교회 전체만 아니라 때로는 교회 밖에까지 임했습니다. 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전 도시가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 W.A. Noble선교사의 선교보고 중에서-

평양 부흥운동은 민족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한국교회의 체질을 복음주의 기독교로 개선시켰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 민족을 갱생시키고 일제 36년을 이길 소망을 주었던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성령의 역사였다.

평양 부흥운동의 배경

1,  국내적으로는 1894년 청일전쟁에 일본이 승리하고, 같은 해에 명성황후를 일본이 죽였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났는데 또 일본이 승리하고,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이 박탈했다.
조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쟁터가 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일본에게 외교권까지 박탈 당했지만 나라를 구할 아무런 힘이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하늘 만이 소망이었다.

2,  한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대부흥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9세기 말 무디 중심의 부흥운동과 1888년 시작된 학생자원선교운동(SVM)으로 미국의 수 많은 젊은 이들이 복음을 들고 전 세계로 나가고 있었으며 한국에도 선교사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3, 1904년에 웨일즈의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1905년에는 인도의 부흥운동, 1906년에는 아주사거리 부흥운동 등 부흥의 불길이 계속 번지고 있었다.

 4, 1903년 부터 하디선교사를 중심으로 원산 부흥이 일어나 서울, 평양, 목포, 제물포에 불길이 옮겨가고 있었다. 1906년에는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위원이자 부흥사인 하워드 존스톤 목사가 웨일즈와 인도의 부흥 현장을 둘러보고 한국을 방문해 서울에서 선교사 사경회를 인도함으로 한국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더 큰 부흥을 사모하는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5,  하위드 존스톤 목사의 도전을 받고 평양으로 돌아온 20여명의 평양 주재 선교사들이 9월 부터 부흥을 사모하여 매일 정오기도회를 시작했다. 역시 평양 장대현교회를 방문했던 존스톤 목사의 도전을 받아 한국의 부흥을 위해 한국의 이반 로버츠가 되기로 헌신했던 길선주 장로가 장대현교회에서 같은 교회의 친구인 박치록 장로와 함께 부흥을 사모하는 매일 새벽기도회를 역시 9월에 시작했다.

6, 1907년 1월 2일 부터 열리는 평안남도연합사경회를 위한 준비기도회가 길선주 장로의 제안으로 1906년 12월 26일 부터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첫날 밤 길선주 장로의 설교가 끝나자 교회는 회개의 울음바다가 되었고 교회에서 죄들을 공개 자백한다는 말을 듣고 범죄자를 잡으러 왔던 경찰 방은덕이 길선주 장로의 설교를 듣고 일어나 대성통곡하며 자신의 죄를 공개 자백 하기도 했다.

한국의 오순절 평양대부흥운동

1907년 1월 2일-15일 기간에 평안남도 남자 연합사경회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다.

낮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1000명에게만 참석이 허락되었고, 밤에는 평양시내 교인들의 참석도 허락되었다. 여자들은 자리가 없어서 4곳의 다른 예배당에 모여 선교사의 아내들이 인도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가 없었고 1월 13일 밤에도 냉냉하게 모임이 끝났다.  다음 날 14일에 선교사들은 정오기도회를 가지면서 영적 부흥을 체험하지 못하고 사경회가 끝나지 않도록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날 밤에 길선주 장로가 회개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1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가 죽기 전에 돈 계산을 잘 못하는 아내 대신 재산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친구의 돈을 정리하다가 당시 100달러 상당의 돈을 사취했던 사실을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눈물로 고백하고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친구 아내에게 돌려 주겠다고 했다.

길선주 장로의 눈물의 자백이 있은 뒤에 담담하던 분위기는 끝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강하게 임재해 주셨다. 그날 밤 예배가 끝난 후에 600명 가량이 남아서 밤이 맞도록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신들의 모든 좌들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고백했다.

현장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지금까지 미국의 제1차,2차,3차 대각성운동과 웨일즈의 부흥운동, 인도의 부흥운동에 대해서 읽고 들었지만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처음이었다고 선교보고서에 보고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블레어 선교사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모든 죄들을 그날 밤에 공개적으로 고백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 심판의 밝은 빛 앞에선 죄지은 영혼들을 보시듯 그들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그 죄악을 청산했습니다. 다음날 길거리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으며, 도둑 맞은 물건들과 돈들이 되돌아왔고 오랫동안 갚지 않았던 빚이 청산 되었으며 그 결과 전 시가지가 술렁거렸다." 고 기록했다.

스왈른 선교사는 "성령께서 임하시니 우리 선교사들이 반 년 동안 해온 일보다 더 큰 일을 성령님께서 반 날 동안에 완성해 주셨고 두 달 동안 2000명 이상이 회심하게 되었다" 고 기록했다.

전국으로 확산되는 부흥의 불길

1월 14-15일 양일간에 장대현교회에서 놀랍게 임하신 성령의 역사는 네 곳에 분산되어 예배드리던 여성도들의 모임에도 1월19일 밤에 강력하게 임하셨다.

평양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인 남산현교회에도 장대현교회의 부흥이 그대로 재현 되었으며, 이 부흥의 불길은 평양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평양신학교와 숭실대학과 숭덕학교에도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 서로 잘못을 고백하느라 수업이 중단되기도 했다.

16일 정오선교사 기도회에는 가장 많은 선교사들이 참석했다. 두 시간 동안이나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 속에서 자신들의 잘못과 죄악을 철저히 회개했다. 부흥의 영으로 충만해진 선교사들은 전국 주요도시들로 찾아가 순회부흥회를 인도함으로 평양에서 있었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한 달도 못되어 서울, 선천, 광주, 청주, 대구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평양 부흥의 현장을 방문했던 카나다장로교회 중국주재 선교사인 조나단 고포드에 의해 만주와 중국의 부흥으로 확산 된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영향과 결과

1,  평양부흥운동은 사경회 기간에 일어난 말씀에 토대를 둔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다.

2,  영적각성운동이 사회개혁으로 열매를 맺었다.
    교육열이 향상되어 이후 수많은 학교들이 세워졌다.
    교회의 신앙 수준이 높아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회자 소명을 받게 되었다.
    수 천 명이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성경공부에 참석했다.
    놀음, 간음, 일부다처, 조상숭배와 우상숭배의 관습이 없어졌으며 금주, 금연운동이 일어났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양반과 상놈의 신분타파가 이루어졌다.
    성경적 죄에 대한 개념이 확실해졌고 도덕성이 회복되었다.

3, 1885년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한 후 20년이 지난 1905년에 교인수가 약 5만 명이 되었는데 1907년에만 3만명 이 회심했고, 1909년에는 약 20만 명으로 증가했다.

4, 부흥운동의 결과로 한국인과 선교사들, 장로교와 감리교, 양반과 상놈 모두가 연합되어 성경번역, 성서공회, 숭실대학, 연희전문대학, YMCA 등 연합체를 이루었다.

5, 한국교회의 부흥의 소식이 선교보고지를  통해 많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자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한국에 많이 와서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6,  이기풍을 제주도로, 최관흘을 블라디보스톡으로, 일본, 만주, 중국 등지로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한국교회가 초기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바뀐다.

7,  무엇보다 일제 36년의 고난과 박해를 이길 수 있는 영적 힘을 얻게 된다.

그 결과 기생과 환락의 도시, 한국의 소돔 고모라로 불리웠던 평양은 거룩한 도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님, 평양 주재 선교사님들의 정오기도회 같은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회가 오늘날 곳곳에서 시작되게 하소서. 그 결과 20세기 초반에 일어났던 세계 곳곳에 일어났던 대 부흥이 오늘날도 일어나게 하옵소서.

이 시대의 부흥을 사모하는 작은 종 강순영(JAMA 대표)

(평양 대부흥운동은 박용규 교수님의 "평양 대부흥 이야기"에서 대부분 인용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