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동성애 문제가 큰 이슈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80년 판 DSM III(정신질환 진단및통계 매뉴얼III)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정신질환으로 분류되었었다. 그러나 1994년 판 DSM IV부터 동성애는 소수의 성적 기호로 취급된다(현재는 DSM V까지 나왔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을 하며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살아간다. 세계적으로 퀴어 축제가 각 나라에서 행해지고 있으며 퀴어 신학이라는 것도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는 동성애자들이 세상을 끌고나가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성애자들도 동성애자들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인권의 측면에서 그들을 지지할 것이다(이 관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자유민주주의의 끝'을 보라). 필자의 생각으로 이것은 필연적이다. 이미 교회라고 칭해지는 많은 곳에서 이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무론 노소하고 동성애를 했다. 그곳에서 롯은 의로운 심령을 상했다. 다시 말해서 대다수가 동성애를 하는 상황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의로운 심령을 상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귀결이다. 그래서 참다운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른 성경적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관찰하며 자신들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때에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탄식이 있다. 동성애가 이슈가 되는 이 상황에서 교회가 동성애자들의 논리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의 주장은, 자신은 선천적으로 동성애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에 대응하는 교회의 논리는 동성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후천적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논의를 하는 것을 보면 좌절을 넘어서서 절망하게 된다. 

단적으로 말해 성경이 죄라고 하면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 무조건 죄다. 또 한 가지 인간 범죄의 모든 기원은 선천적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태어난 인간은 모두 전적 타락의 상태에서 태어나 스스로는 아무런 선이나 의도 행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죄다. 

하나님의 규례 즉 캐논(잣대)을 떠난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발현되었든 발현되지 않았던 모든 끔찍한 죄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다만 인간 세상에서는 발현되면 죄인이고 그것이 발현되지 않으면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뿐이다.

다윗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을 고백한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한다. 인간의 기준으로 정직하고 청렴하며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죄다. 

우리는 이 관점에서 동성애에 접근해야 한다. 

동성애를 정죄하기 위해서 동성애의 선천성을 부정하는 이들에게 하나 묻자. 옛말에 '열 여자 마다하는 남자 없다'라는 말이 있다. 남성의 정욕은 그 한계가 없다. 의자왕은 삼천 궁녀를 두었다. 아담 이후 남성의 그 정욕은 선천적이다. 그러면 그들이 선천적인 본성대로 행하면 죄가 없는가? 이 여자 저 여자와 간음을 저지르고 불륜을 행해도 그것이 선천적이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가? 그러면 사이코 패스로 태어난 사람이 연쇄살인을 즐기는 것은 어떤가? 사이코 패스는 뇌의 구조가 정상인과 다르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태어날 때 뇌의 '불구'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뇌성마비나 손가락이 없이 태어나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그런 사람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천적 기질이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가?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런 사탄의 논리에 코뚜레가 꿰어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니고 있다. 본질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다. 그저 도전이 오면 진리가 아니라 임기응변을 동원해서 대응한다. 성경적, 신학적 통찰력이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가 죄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선천성 후천성을 따져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그 문제의 기독교적 해결 방법은 오직 창세기의 창조 질서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최우선적으로 주신 복이 '번성'의 복이다. '번성'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오직 암수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진다. 

창조주께서는 피조세계가 소멸되어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번성해서 풍성한 모습이 되는 것을 원하신다. 모든 피조물은 다음 세대를 위해서 거의 목숨을 건다. 어떤 피조물은 죽기 직전 씨를 퍼뜨리고 죽는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들은 창세기 1장 22절, 28절에서 주어지는 번성의 복을 누린다. 인간만 피임을 하고 산아제한을 한다. 그 결과가 '인구 절벽'이다. 필자는 1970년 대 산아제한을 요구했던 정부의 입장을 이해한다. 시대적으로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교회는 달라야 했다. 목사들은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재앙을 불러일으킬 줄 알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교회에서도 산아제한을 장려했다.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절대주권, 섭리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창조 질서 속에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남녀 결합의 유일한 목적은 번성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남녀 결합에 아가서에서 나타난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허락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적인 결합의 유일한 목적은 즐거움이 아니라 '번성'이다. 번성 없는 성적 즐거움은 용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된다. 성이 즐거움만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부부관계 속에서는 즐거움만을 위해 사용되어도 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도 동물과 같은 '발정기'를 주셨을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의 '금욕주의'를 보라). 동물들은 발정기가 아니면 결합을 하지 않는다. 그 발정기는 오직 번성만을 결과한다. 

그러나 인간은 '발정기'가 따로 없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신묘막측한 섭리다. 인간은 '번성'의 방식인 결합을 통해 즐거움을 느낀다.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을 통해서 번성하게 하신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즐거움을 위해 잠자리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즐거움을 이용해서 번성을 섭리하신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부부의 애정을 위한 콘크리트로 그 즐거움을 허락하신 것이다. 즐거움을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 관점에서 어거스틴은 실패한 것이다.

인간은 성적 결합을 통해 즐거움을 느끼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창조 질서를 이루어가신다. 따라서 산아제한이나 피임은 신학적으로 다시한번 깊이 논의되어야 한다. 산아제한이나 피임의 목적이 무엇인가? 먹고 살기 위해서 입을 줄이고, 양육의 수고를 피해서 그 시간을 자아실현에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은, 특히 크리스천에게는 내 책임이 아니라 하나님 책임이다(마 6:25-34). 그것을 염려해서 번성을 피하는 것은 전적으로 창조질서를 반역하는 죄다. 
동성애는 어떤 경우든지 '번성'이라는 최우선적인 창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에 대해 교회가 왜 사회적인 기준과 타협해야 하는가? 불신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성경의 인용보다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회철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기준을 모두 포기하고 저들의 논리를 바탕으로 그것을 논박하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캐논)이 없이 어떤 가치기준으로 저들의 논리를 대응하겠는가? 

이 논쟁은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다. 논쟁을 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하려면 토론의 장에 그냥 백기를 들고 들어가라. 그리고 항복하라. 창조질서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세상과의 그 어떤 논쟁에서도 무조건 진다. 

특히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의 제대로 된 이해가 없다면 그냥 두손 들고 항복하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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