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인류가 장차 경험할 판데믹의 서막
중국 우한에서 발원한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사태로 전 세계가 미증유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초유의 판데믹이 근자에만 발생한 것은 아니다. 100여년 전, 1918년에 시작한 소위 '스페인독감'이라는 최악의 판데믹으로 약 5천만 명에서 1억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란에 휩싸인 국가들의 언론사들이 보도검열로 범유행전염병을 기사화하지 않고 있을 때, 전쟁에 비켜 서 있던 스페인 언론이 대서특필함으로써 이 재앙은 '스페인독감'이라 명명된다. 세계 1차 대전의 막이 서서히 내려지고 있는 그때 1918년 봄부터 1919년 겨울 사이 세 차례 창궐한 전염병은 영국, 미국, 중국, 일본 등지를 강타했고 심지어 한반도 조선까지 전파되어 14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조선 전체 인구의 0.8%, 즉 100명 중 1명꼴로 죽은 셈이다.
이 스페인 독감은 14세기 유럽 인구 30%(약 2천 5백만 명)에 달하는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과 함께 인류 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범유행전염병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20세기에 일어난 모든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합한 총계보다 이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다. 직경이 100나노미터에 미치지 못하고, 11개의 하찮은 유전자로 이루어진 단순한 바이러스에 의해 수많은 생명들이 스러진다. 확산 본능을 지닌 바이러스의 세계는 우리 인간에게 여전히 신세계이며, 지구촌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개척지와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코로나-19로 인한 판데믹은 서막에 불과하다.
우리를 둘러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바이러스는 병원균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생명체다. 바이러스는 지구에서 어떤 유기체보다도 빠른 속도로 진화하지만, 다른 생명체에 비해 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상당히 부족하다. 영어 단어 바이러스(virus)는 라틴어 '비루스'(virus)에서 유래한 단어로 '독성(毒性) 분비물'이라는 뜻이다. 바이러스를 살아있는 액성 전염물질로 오해한 연유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성장하거나 생식할 수 없기에 자신들이 감염시킨 세포에 기생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숙주세포를 감염시킨다. 이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바이러스가 기생하기에 너무나 좋은 블루오션이다.
바이러스는 두 가지 성분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유전물질인 RNA(리보핵산)나 DNA(디옥시리보핵산)이고, 다른 하나는 유전자를 보호하는 단백질막이다. 이 단백질막은 숙주세포의 벽에 달린 수용체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수용체는 일종의 '자물쇠'인 셈이다. 이 바이러스의 열쇠가 자신에게 꼭 맞는 세포 자물쇠를 찾아내면 그 세포 조직의 문이 열린다. 그 후, 바이러스는 숙주세포에 들어가 세포 조직을 강탈해서 성장하고 번식한다.
현재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도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해 인체에 침투한다. 자신의 표면에 있는 스파이크 단백질로 숙주세포에 달라붙은 후, 세포가 가진 단백질가위를 활용해 자신의 스파이크 단백질 일부를 잘라낸다. 이로써 바이러스막과 인간 숙주의 세포막이 융합된다. 이 때 바이러스막 속에 보관하고 있던 RNA 게놈이 숙주세포 안으로 침투하여 본격적 증식활동을 벌인다. 이때부터 침입자가 주인노릇을 하고 자원을 강탈당한 주인(세포)은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다. 1960년대에 처음 발견된 코로나바이러스의 명칭은 독특한 형태의 스파이크 단백질 때문에 라틴어로 '왕관'을 뜻하는 '코로나'(Corona)에서 유래하게 된 것이다. 2003년 중국에서 발생해 세계로 퍼져 7백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사스, 2015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메르스가 모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스, 메르스와 다른 세 번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고 볼 수 있는 세계에 익숙하다. 어떤 병원균이라도 볼 수 있는 그런 마법의 안경이 있다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이전과는 크게 다르게 보인다. 무척 역동적이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곧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가 거하는 공간 곳곳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생명체들로 우글거린다. 책, 벽, 커피잔, 카펫 바닥, 온갖 손잡이에 박테리아는 물론 엄청난 작은 병원균들이 득시글거린다. 우리가 매일 밟고 살아가는 흙 아래 세계는 어떤가. 그곳에는 온갖 미생물들이 하나의 작은 우주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2005년 <사이언스>에 발표된 바로는 불모의 땅이든, 기름진 땅이든, 흙 1그램에는 100만 종의 세균이 산다고 한다. 흙 1,000m2에 사는 세균의 무게를 모두 합하면 300킬로그램 정도 될 것이다. 한 큰 술도 안 되는 흙에 세균이 100만 종이나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큰 생명체만을 인지할 수 있는 우리 감각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생명체의 풍요로움을 잊고 살아간다.
코로나바이러스, 탐욕 바이러스에 걸린 인간이 자초한 재앙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바이러스도 끊임없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즉 확산되어 숙주의 면역체계에 생포되는 위험을 무릅쓸 것인가, 아니면 동면 상태로 잠복하여 자신의 안전을 지키면서 후손을 포기하느냐 하는 두 가지 갈래길에 놓인다. 숙주의 죽음은 바이러스에게도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주변의 환경적 변수들을 주기적으로 점검한다. 다른 두 종류의 바이러스가 동일한 숙주에 기생할 경우, 때때로 그들은 동일한 세포를 감염시켜 유전정보를 서로 교환함으로써 제 삼의 '모자이크 딸바이러스'(mosaic daughter viruses)를 탄생시킬 수 있다. 코로나-19 또한 이런 돌연변이다.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는 이러한 생명현상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끊임없이 일어나는 아주 역동적 터전이다.
이번 판데믹은 개발과 발전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다. 인간의 자연 파괴로 인해 야생동물의 서식지는 갈수록 줄어들고, 인간과 야생동물의 접촉 빈도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동물에서 인간으로 전이될 수 있는 바이러스는 갈수록 늘어날 테고 보다 많은 변종 바이러스가 생길 확률은 고조된다. 사스나 메르스 같은 바이러스 감염병은 사향고양이나 낙타와 같은 중간 숙주를 거쳐 인간에게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는 천산갑을 중간 숙주로 하여 인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병원균들마저 세계화된 세상에 살고 있을 정도로 세계는 더욱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현시대의 교통 혁명은 바이러스 폭주로 이어진다. 현재 지상에는 5만여 곳의 공항, 3,200만 킬로미터가 넘는 도로, 110만 킬로미터 이상의 철로, 해상에는 수십만 척의 크고 작은 선박들이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엄청난 양의 물자를 실어 나른다. 이전에는 한 지역에서 발생하여 기생하거나 사라지던 바이러스들이 교통 혁명으로 이동하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모두가 연결되는 하나의 세계가 되었지만 세계는 온갖 병원균들이 뒤섞이는 거대한 용광로가 된 지 오래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자행한 자연 착취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판데믹으로 몰아가고 있다. 삶의 터전인 지구가 우리 인간으로 인해 그동안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바이러스의 행태다. 코로나-19는 우리 생의 터전, 자연을 돌아보라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게 보내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하나님 형상 회복만이 진정한 백신
칼과 / 흙이 싸우면 / 어느 쪽이 이길까 / 흙을 / 찌른 칼은 / 어느새 / 흙에 붙들려 / 녹슬어버렸다. 생태시인 김준태의 <칼과 흙>이란 시다. 이 시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칼'과 '흙'이라는 시어는 많은 것을 응축하고 있는 상징어다. '칼'은 인간 문명을 뜻하는 어휘고, '흙'은 생명력의 창조적 기반인 자연을 함축하는 언어다. 탐욕과 횡포라는 문명의 독기를 품은 서슬 퍼런 칼이 흙을 이길 것 같지만, 포용력과 생명력으로 충일한 투박한 흙에 붙들린 채 칼은 결국 시뻘겋게 녹슬어 버린다. 인간의 탐욕이 휘두르는 칼이라는 문명 앞에 흙은 큰 위해를 경험하지만, 그렇다고 문명이라는 칼이 흙으로 상징된 자연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흙(자연)의 힘에 비하면 칼(문명)의 힘은 너무나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현대 산업사회의 목표는 경제적인 부, 풍요 및 성장이다. 생태 위기를 가져온 가장 근본적 원인은 과도한 소유와 향락에 삶의 궁극적 의미를 두는 현대인들의 소비주의 가치관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었고 일상생활은 기계화되어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상실케 한다. 시장경제가 부추기는 소비주의는 인간다운 주체성과 의식을 구속하고 생태계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생태계는 하나님과 모든 만물이 거처하는 '공동의 집'이기 때문에 생태영성은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인식하고 생명의 길에 참여하는 실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고 자연은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그런 대상으로 인식하는 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과 파괴는 계속해서 되풀이될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그 타락의 결과를 묘사하고 있는 창세기 3장과 그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불순종은 생태계에 저주를 가져오고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타락과 폭력과 파괴의 확산으로 이어지게 한다. 우리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것을 파괴할 권리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스러지고 국경이 닫히고 도시들은 폐쇄되고 시민들이 자택 격리되는 이 현실을 누군가는 그로테스크하다고 표현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잊은 채 신음하는 피조세계를 외면한 우리 현실이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로테스크한 것이 아니라 코로나바이러스가 침투한 폐와 같지 않겠는가. 인간의 오염과 파괴에 대해 자연은 인간이 한 만큼만 되갚아주는 일대일의 수치가 아닌 제곱수로 늘어난 재앙을 내리다 결국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 타격을 인간에게 가할 것이다. 우리가 자연환경으로 더 깊이 들어가 그곳을 파괴할 때, 새로운 판데믹은 끊임없이 출현할 것이다. 인간이 뿌린 죄악의 씨앗들은 도처에 흩뿌려져 움트고 자라 가시덤불같이 뻗어나가 우리 삶의 터전인 생태계를 묵정밭처럼 만들고 있다. 이 땅에 짙게 드리워진 탐욕이 독성 바이러스가 되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처참히 무너뜨리고 있다. 판데믹의 근원은 새로운 병원균이 아닌 탐욕 바이러스에 걸린 인간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터전이 더 이상 황폐화되지 않도록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자.
우리 삶의 근간을 흔드는 아주 작은 생명체를 통해 하나님은 그 나라를 꿈꾸며 그 형상을 회복하라고 일갈하신다. 하나님 형상 회복만이 오고 오는 세대를 살릴 수 있는 진정한 백신이다.
이상명 박사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