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죄와 비참'은 시대를 불문한다. 어떤 특정 시대가 다른 시대보다 더 악하거나 더 비참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세지말(末世之末)'인 지금이 가장 악하고 비참하다고 하나,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전 1:9)"는 말씀처럼 아담 이후 쭉 그래왔다.

이는 "모든 인류가 타락함을 인하여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고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이게 됐으며 생전에 모든 비참함과 사망과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제 19문)"고 한 웨스트민스트 소요리문답서(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에서도 확인된다.

시대를 불문한 이런 인간의 '죄와 비참'을 아시는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인간의 '죄와 비참함'에 놀라 호들갑 떨지 않으신다. 또 하나님은 그런 것들에 그의 예언을 집중하지 않았고, 단지 그것들을 해결하려고 선지자를 보내지도 않으셨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신 것도 인류의 근원적인 '죄와 비참'이었고, 죄인을 그것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이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놋뱀을 쳐다봄'으로 구원받게 하신 사건(민 21:9)도 죄로 멸망해 가는 인간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것에 대한 '믿음'을 표상(表象)한다(요 3:14-15).

광야를 통행하던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징계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려 했던 것도 그들의 '믿음 부재'에 대한 것이었다(히 3:15-19). 형식상 내용은 늘 '불순종'이었지만 사실 '불신앙'을 의미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외식(外飾)'을 책망했던 것도 그들의 '윤리적 위선'이 아닌, '믿음의 의(義)'의 부재였다(마 5:20). 신약 성경에서, 그의 가르침과 책망의 내용은 항상 그것에 집중됐다. 성경을 읽을 때 '계시적 의미'가 배제된, '역사적 사실'과 '문자적 의미'만 추적해선 안 될 이유가 여기 있다.

계시적 의미가 배제될 때, 성경은 다만 이스라엘의 '종교사(History of religion)' 혹은 '종교 윤리(religious ethics)'에 지나지 않게 되고, 필경 잘못된 적용을 낳는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역사주의(historicism)' 와 '문자주의(literalism)'에 매몰돼 그것이 표상한 '그리스도'를 놓친 때문이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이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이 계시(啓示)하는 자신(예수 그리스도)을 읽어내는 일 에 실패했다는 의미였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 수건이 그들의 얼굴을 가렸다고 한 것도 그들의 '율법 읽기'에서 그것이 표상하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음을 지적한 것이다(고후 3:13-14).

이렇게 성경의 내용들이 표상하는바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믿음'을 놓치게 될 때, 성경을 적용함에 있어 '역사적인 내용'을 '현재의 정황'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는 다만 '성경 적용의 적실성(適實性)' 문제만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현실적 대안을 제공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제정(祭政)이 일치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다종교'의 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도 없다.)

성경은 어떤 한 시대, 한 특정 사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 주는 책이 아니다. 모든 시대,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리, 곧 '모든 인간은 하나님 심판아래 있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임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성경의 표현 양식에서 보듯,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말할 땐 언제나 당대의 이슈(issue)와 그 대응책을 제시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 죄인의 운명'과 '구원자 그리스도'였다. 어찌 보면 그들이 들고 나왔던 '당대 이슈(issue)'는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한 빌미에 불과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이란 말을 한번쯤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예언'이란 앞날에 닥칠 일들을 '미리 말한다(豫言)'는 의미도 있지만, '맡겨진 것을 말한다(預言)'는 의미도 있다.

둘을 결합하면 '예언자'란 '죄인에게 닥칠 급박한 심판'과 그러한 절박한 죄인을 구원하라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복음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자'이다(고전 4:1-2). 흔히 생각하는 그런 '예언자'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 주위에는 예언자연(預言者然)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시대의 난제'를 해결해 주고, 교회의 좌표를 제시하는 것을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적 이슈가 등장하면 발빠르게 이런 땐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 대안이라며 나름의 해법을 들고 나온다.

그런데 그들이 주로 차용하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성경에서 현실과 유사한 예를 찾아 그 둘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세대주의', '실용주의'가 그 아류(亞)이다.

그들은 격동기마다 성경을 무리하게 현실에 대입시켜 왔다. 한국교회만 보더라도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지나치게 '종말론주의'로 흐른 것이나, 6.25전쟁 후 '현세기복주의'로 흐른 것도 그런 경향성의 일단이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율법주의적 해법 역시 그들이 흔히 채용하는 방식이다. 중국 우한(武漢)에서 처음 코로나(COVID19)가 발병했을 때, 어떤 한국 목회자가 '권선징악적' 분석을 내놓았다가 자기 교회에서 감염자가 발생하자 머쓱해 한 일이 있었다.

이렇게 성경 이해가 역사주의, 문자주의에 매몰될 때, 기독교는 '실용주의 기독교', '계몽주의 기독교'로 전락된다.

질병, 기아, 전쟁 등은 인간 생존을 위협하는 불행이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그것은 죄인에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보편적인 일이다. 정도(程度)와 지역(개인)별 차이만 있을 뿐, 그것이 없었던 시대가 없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재난도 꼭 어떤 특별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욥이 "인생은 고난을 위해 났고 그것은 불티가 위로 날으듯 자연스럽다(욥 5:7)"고 했듯, 고난은 죄인 누구에게나 임하는 보편적인 일이다. 다행히 지금껏 그것이 극심하지 않았다면, 이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따라서 재난 앞에서,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될 무슨 특별한 일인 양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 죄인으로서 마땅히 당할 일을 당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도 특별하거나 비상할 것이 없다.

교회들이 '이런 위기엔 교회가 뭐든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면피성 이벤트로서 '급조된 회개 운동' 같은 것은 내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늘 그래왔듯,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대적을 일삼는 인간의 절망적인 죄악과 비참함을 깨닫고 겸비히 하나님 앞에 조아리며 그의 자비를 구할 뿐이다.

그리고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런 일시적인 재난보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아래 놓인 인간의 비참함이다. 사람들이 주목할 것도 이것이다. 어쩌면 재난은 인간들로 하여금 그의 '죄와 비참함'을 돌아보고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부르시는 '은혜의 부름(The gracious calling)'일 수 있다.

다윗은 심판이 코앞에 있는 절박한 죄인들에게 권면한다. "아들(그리스도)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시 2:12)".

죄인의 운명을 '사형 집행을 위해 교수대 위에 선 죄인'에 비유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말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19(COVID19) 형국(形局)을 맞닥뜨렸다. 미증유의 경험이다. 한 마디로 '혼미' 그 자체이다. 모두가 두려움과 공포에 쌓여 있으며, '매스미디어'는 하루종일 이 주제로 들끓는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모든 교회의 설교 주제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일 것이다. 교회라고 해서 이 형국에서 예외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모두를 공동운명체로 묶었다. 신·불신(信不信)을 막론하고 온 세계가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안간힘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뭔가 달라야 한다. 두려움과 불안을 아주 떨칠 수는 없을지라도, 세상 사람들처럼 혼비백산하거나 언론의 멘트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참에 세상에 몰입됐던 우리의 시선을 위의 하나님께로 향하고, 복음에 몰입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때에 살았던 '아더 핑크(A. W. Pink. 1886- 1952)'는 전투기가 자기 다락방 위를 날아다니며 하루에도 몇 번씩 공습경보가 울리는 환경 속에 놓여 있었지만, 당시 그가 발간했던 '성경 연구지(studies in the scriptures)'에는 이에 대한 시사가 거의 없다.

한두 번 남의 이야기하듯 '전투기가 내가 머물고 있는 다락방 위를 매일 지나다닌다'는 정도로만 언급했으며, 조금의 동요도 없이 독자들에게 발송하기 위한 '성경연구지' 발행에 몰입했다.

진정한 '예언자'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건의 해법을 제시하여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난국을 타개해 주는 자가 아니다. 근원적인 '인간의 죄와 심판'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말해주어 사람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주는 자이다.

난국(難局)에는 사람들이 그 상황에 매몰되어 마음이 혼미해지고 근원을 놓치기 쉽다. 난국일수록 근원적인 복음에 더욱 천착했으면 한다. 그것이 난국을 이기는 길이기도 하다.

개혁주의자들이 연속적인 '본문강해 설교'를 고집한 것도 그들이 처한 시세(時世)에 영향받지 않고 복음에만 치심하기 위해서였다.

코로나19 형국(形局)을 지나는 동시대의 모든 독자들에게 '복음의 위로'를 전한다. '사랑의 사도' 요한(John)과 바울(Paul)의 권면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