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인격(人格)'에 지나친 가치 부여를 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그 분은 참 인격자야'하면 껌벅 하고, '그는 이중 인격자야'하면 그냥 몹쓸 사람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그러나 그 단어의 개념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용어에 그리 신뢰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인격'이라는 영어의 'personality'는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나온 말이다. 그 뜻은 배우가 무대에서 쓰는 '가면(假面, mask)'혹은 연기자가 작품에서 자기가 맡은 '배역'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격'이란 흔히 상상하듯 살아오며 선악 간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품성이라기보다, 연기자의 배역처럼 필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채용된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인격의 '가면' 개념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렘 17:9)" 인간 죄성에 대한 인식에 의해 채용됐을 것이라는 추정을 갖게 한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그대로 노출된다면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인간의 이중성을 말할 때 '지킬 박사와 하이드(Dr. Jekyll And Mr. Hyde)'의 예가 곧잘 등장한다. 작가는 그것을 통해 어떤 특정인의 병적 현상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된 '이중성' 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는 성경 말씀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렇게 볼 때, '가면'은 꼭 부정적인 것만이 아닌, 인간 생존을 위해 채용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가면을 쓰지 않으면 일할 수 없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의 '감정 노동자들(Emotional Laborers)'이 대표적 직업군이 아닌가 한다. 현대인의 필수 요목인 '포커 페이스(poker face)'도 일종의 '가면' 개념이다.

나아가 '다중인격 증후군(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이란 것도 꼭 특별한 병리 현상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닌 듯하다.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몇 개씩의 가면들을 채용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스위스 정신과 의사 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사람들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천 개의 가면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한 말에 의거하면,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하다.

탁월한 연기자들에게 따라붙는 수식어가 '팔색조(八色鳥, fairy pitta)'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다양한 배역들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는 뜻이다.

적재적소에 맞게 '가면'을 잘 환용(換用)하는 처세술의 달인, 소위 경세가(經世家)들 역시 팔색조가 아니겠는가?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구색을 맞춰 옷을 입는 '굿 드레서(good dresser)'역시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을 연상시킨다.

사람들로부터 '토마토처럼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사람'이라는 호평을 듣는 사람은 정말 그가 겉과 속이 일치되어서라기보다, '가면'을 시의적절히 잘 환용(換用)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변덕스럽고 이중적이라는 평판을 받는 사람 역시, 그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서 라기보다는 '가면'을 능숙하게 활용하지 못한 때문일 수 있다.

사람들은 일편단심(一片丹心) 일 것 같았던 부부나 친구가 하루아침에 변심을 한다거나, 평소 그렇게 신뢰를 주고받으며 우호적이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싸늘하게 등을 돌릴 때, '어떻게 저럴 수 있나?'라며 낙담한다.

근자에 목회자나 지명도 있는 기독인들, 특히 그동안 타인의 잘못에 대해 날선 비판을 했던 이들의 실족을 보면서, '지금까지 다 쇼였다는 말인가?'라며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인간의 가면적 실상을 심층적으로 들여다 보았다면, 아마 훨씬 내성(耐性)있게 반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의 가면성(假面性)은 보편적이다.

그러니 이방원(李芳遠, 1367-1422) 의 '하여가(何如歌)'처럼, '깔끔 떨지 말고 둥굴 둥굴 살자'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나할 것 없이 인간은 부패덩어리이며, 어느 순간 '가면' 속에 감춰진 실상이 '나 여깄소'라고 얼굴을 내밀지 모르니 너무 유별을 떨거나 장담하지 말자는 뜻이다.

이즈음 클로즈업되는 이들이 있다.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르친 목사들 때문이라며, 입에 침을 튀기던 '이신행칭의자(以信行稱義者)'들이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의 실족을 인간의 부패성보다는 교리 탓으로 몰아 붙였다. 그러나 근자의 사건들이 보여주는 사회적 경험치(經驗値)는 엄격주의를 고수한다고 느슨해지지 않는 것도, 은혜주의를 고수한다고 느슨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엄격주의자도 은혜주의자도 모두 죄인이며, 예외 없이 다 유혹에 취약하다. 죄인은 등 따시고 배부르면 엉뚱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이는 교회사가 가르치는 교훈이기도 하다.

환란 때에 목숨 걸고 신앙을 지켰던 산 순교자들(?)이 평안의 때에 어이없이 실족하는 안타까운 사례들이 그것을 웅변해 준다. 인간은 다 모두 별 수 없다는 뜻이다.

'가면'을 쓴 죄인은 자신의 유불리(有不利)와 다양한 상황에 따라 언제든 자기의 감추인 민낯을 드러낼 수 있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하지 않고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히 13:8).

사람들의 '호상(good image)'에 혹 할 것도, '밉상(bad image)'에 실망할 것도 없다. 다 거기서 거기다.

이처럼 부패한 인간 실상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게 한다. 그가 자신에 대해 주목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 골 3:10)'이다.

누가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우쭐해 하지 않으며, 자신의 죄성을 직면해서도 지나치게 절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가리려고 애써 '가면(假面)'을 채용하지도 않는다. 이제 그것들은 그에게 모두 패싱(passing)이다.

넘어졌다면 베드로가 그랬듯 십자가를 의지해 벌떡 일어나면 되고, 그것 때문에 자기 연민과 자학에 빠지거나 그것과 노닥거리며 시간낭비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함께 공유한다.

죄를 범하고 책임 회피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죄인에게서 부패한 것이 나오는 것은 거름더미에서 구데기가 나오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니, 자신의 실수에 지나치게 낙심천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이상 죄의 교묘한 기만(欺瞞, deception)에 휘둘리지 않으며,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한다(고전 4:3-5).

누가 자신을 표리부동하다고 비난해도, 지나치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며,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죄'와 '의'가 그 안에 공존한다는 것을 알기(롬 7:21) 때문이다.

그는 루터(Martin Luther)가 말한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자아의 불일치'와 거기에 따른 '갈등'을 수용한다.

이 점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행위적 의로 만든 '짝퉁 의(false righteousness)'가 자신의 '진면목'이고, 그것이 자신들을 속속들이 의롭게 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들의 여러 '가면들'에 또 하나의 '가면'을 추가한 것에 불과하다.

대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의(빌 3:9)'라는 '진면(眞面, true character)'을 덧입었다. '진면'이라 했음은 그것이 영원한 그의 법적 신분이며, 그리스도의 심판대까지 유효성이 견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진면'은 자신의 의(義)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그리스도로부터 전가(轉嫁)받은 것이기에, 그 '진면' 안에 여전히 자신의 부패성이 도사리고 있음도 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인정하며 겸손해할 줄 안다.

'인격'의 라틴어적 '가면' 개념은 칸트(Kant)의 인격주의(人格主義) 우상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예수님도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짝퉁 의(false righteousness)'로 포장된 인격을 위선이라고 책망하셨다(마 23:25-28).

인격을 논할 때, '믿음의 의'를 제쳐놓고선 아무 의미가 없다. '만물보다 부패한 인간'은 '믿음의 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포장해 봐도, 분뇨에 향수를 뿌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넘어졌는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 됨을 솔직히 시인하라. 그러나 지나치게 죄의식, 자학, 자기 연민에 빠져 그것들과 노닥거리며 시간낭비 하지 말라. 또한 이전에 그랬듯이, '가면'을 채용하려고도 말라.

'믿음의 의'로 조각된 당신의 '진면'은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 아니 영원히 벗겨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긍휼을 의지하고 십자가로 다시 일어서라.'그러면 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