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 실천신학)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 실천신학)

원포인트의 드라마틱한 강해설교란 무엇인가?

삼대지 설교가 여전히 대세인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 현재 최고의 관심사가 하나 있다. 그것은 '원포인트 설교'이다. 15년 전만해도 설교자들의 제일 흥밋거리는 수사기법(Rhetorical technique)이었다. 하지만 원포인트 설교가 이슈인 지금 절실한 것은 원포인트로 흘러가는 프레임의 개발이다. 평생 설교하면서 세 개의 대지로만 설교하다가 한 주제로 30분짜리의 설교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잘 포착한 몇몇 목회자들이 원포인트로 흘러가는 효과적인 설교의 프레임을 개발하여 '원포인트의 설교 세미나'를 운영해왔고,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값비싼 회비를 내고 거기에 참석해서 설교를 배우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필자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 세미나 강사들은 대부분이 성경신학이나 설교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들이다. 원포인트를 제대로 가르치려면 우선 성경 본문에 대한 통전적인 지식과 실력이 갖춰져야 하는데, 참가자들에게 주석도 보지 말라고 강권할 정도로 성경해석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임에 유의해야 한다. 무자격 무면허 의사에게 몸을 맡기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설교 세미나가 너무도 많다.

그런가 하면 정작 설교학을 전공한 학자들은 목회자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지 못한 채 설교의 실제나 원포인트 설교에 관한 구체적인 노하우를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때문에 필자는 15년 전부터 성경적인 흐름으로 흘러가는 원포인트의 드라마틱한 설교의 프레임을 창안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원포인트의 설교'는 세 개의 대지로 이루어지는 단조롭고 천편일률적인 설교의 방식을 배제하고 하나의 큰 메시지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해나가는 설교를 말한다. 삼대지 설교가 왜 문제가 있느냐 하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삼대지 설교는 비성경적(unbiblical)이거나 덜 성경적인(less biblical) 설교, 그리고 비효과적인(ineffective) 설교가 될 가능성이 많은 설교이다.

오늘날 삼대지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보라. 어떤 성경을 본문으로 잡든, 심지어 본문이 한 구절이어도 주일만 되면 어김없이 세 개의 대지가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성경본문을 해치는 건지 한번 상상해보라. 뿐만 아니라 삼대지 설교는 대지가 많다 보니 청중들에게 들은 설교의 말씀을 잘 새겨주지 못한다는데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설교를 한 주 내내 준비하고 설교한 사람조차 한 주가 지나면 다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한 번 설교를 들은 성도들이 어떻게 세 가지를 기억해서 일주일 동안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지 생각해보라.

이처럼 비성경적이고 비효과적이라는 이유로 설교할 때는 언제나 모던 시대(modern times)에나 통하던 획일적인 삼대지 방식을 사용하기보다는, 원포인트의 주제를 가지고 연속성(sequence)과 역동성(dynamics)과 반전(reversal) 프레임으로 흘러가는 설교를 많이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구약과 신약은 어떤 본문이건 간에 모두가 다 원포인트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마다 보조 대지(sub point)가 한두 개 아니면 두세 개 들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본문이든 주대지(main point)는 딱 하나(one)다.

쉽게 설명하면, 성경의 모든 밭 속에 산삼 한(one point) 뿌리는 다 들어 있는데, 홍삼 한 두(sub points) 뿌리가 들어 있는 밭도 있다. 그런데 어떤 본문에서건 모두가 삼대지로만 설교하려다 보니 정작 중요한 산삼 한 뿌리는 다 놓친 채 덜 중요한 홍삼 세 뿌리만 캐내어 강단에 내어놓곤 한다. 그것도 그 속에 세 뿌리가 정확하게 들어 있다면 모를까, 한 뿌리나 두 뿌리 밖에 없는 본문임에도 주일만 되면 어디서 캐내어 왔는지 어김없이 세 뿌리가 강단에 마련되어 있음을 본다. 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비효율적인 설교인가?

그래서 성경 저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핵심 메시지 하나(one point)를 본문 속에 남긴 것이다.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를 한 마디로 심어주고자 함이다. 그래야 오래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하려면 우선 본문 속에서 하나의 핵심 메시지를 추출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 거기서 발라낸 영양만점의 살점 한 덩어리로 맛있게 양념을 치고 요리하는 원고작성의 작업이 필요하다.

필자가 독창적으로 개발 창작한 '원포인트의 드라마틱한 강해설교'는 원포인트 설교와는 또 다른 방식의 설교이다. 한 가지 핵심 메시지를 가지고 설교문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원포인트의 설교'와 차이점이 없으나, '드라마틱한'이란 용어가 하나 더 첨가되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드라마틱한'은 '내러티브'의 쉬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은 다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것도 반전이나 드라마틱한 흐름이 없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내러티브로 살아남지 못한다. 원포인트로 흘러가는 설교문을 작성하되 정답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제목에다 1대지, 2대지, 3대지로 끊어지는 전환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연결시켜가는 연역적 방식이 아닌,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예상 뒤엎음과 반전에 의해 드라마틱하게 흘러가는 귀납적 방식의 설교 스타일이 절실하다. 이 설교의 방식은 청중들을, 설교를 듣는 객이 아니라 스스로가 진리를 발견해나가는 일에 설교자와 함께 동참하는 주체가 되도록 만드는 장점이 있다. 이런 설교를 싫어하거나 꺼릴 청중들이 있을까?

그럼 한 편의 원포인트의 드라마틱한 강해설교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지금부터 그에 관한 전략을 여러 단계에 걸쳐서 간단하게 소개해보기로 한다. 이번 호에서 필자가 다룰 본문은 '공동체'를 주제로 한 삭개오에 관한 내러티브(눅 19:1-10)이다. 이 본문은 기독교인이면 누구나가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너무나도 익숙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 본문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이가 몇 있을까 할 정도로 쉽지 않고 의미심장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럼 이제 각 단계를 거치면서 한 마디로 본문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이 기막힌 흐름으로 전개해나가는 원고로 만들 수 있는지를 함께 나눠보자.

1. 본문 선정과 원문에 충실한 번역

우선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 있다면 그것은 설교할 본문을 정하는 일이다. 강해설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본문의 핵심 메시지가 포함될 수 있을 만큼 본문의 길이를 최대한 길게 잡아줘야 한다. 아무리 본문을 성경원문에 맞게 잘 번역한다 하더라도 본문을 너무 짧게 잡아서 중심 메시지가 있는 구절까지 길게 잡지 않는다면 이미 강해설교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따라서 본문을 제대로 선정하는 일은 강해설교가 되기 위한 기초 쌓기 중 제일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본문 선정>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삭개오가 주인공이 되어 소개되는 하나의 자연스런 내러티브로 되어 있으므로 본문선정 작업이 그리 어렵지 않다. 어느 누가 삭개오의 이야기로 설교의 본문을 정하더라도 누가복음 19장 1~10절까지보다 더 짧게나 길게 정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본문을 저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있는 그대로 번역할 준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원문과 우리가 가진 한글개역개정에 있어서 내용의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다양한 역본들을 참조해야 하며, 가능하면 헬라어 원문을 직접 번역할 수 있으면 제일 좋다.

<수정되어야 할 번역>

본문에서 원문의 내용을 참조해서 확인해야 할 구절이 있다면 8절이다. 우리말 본문 8절의 번역이 다음과 같이 잘못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한글개역개정).

하지만 영어역본들은 모든 번역이 다음과 같이 원어에 맞게 제대로 번역되어 있다.

"And Zacchaeus stood and said to the Lord, 'Behold, Lord, the half of my goods I give to the poor. And if I have defrauded anyone of anything, I restore it fourfold'"(8, ESV).

헬라어 원문에서는 이탤릭체로 굵게 표시된 두 동사가 우리말성경에서처럼 미래시제('주겠사오며' ... '갚겠나이다')가 아니라 현재시제('주며'[give] ... '갚나이다'[restore])로 되어 있단 점에 주목하라.

어째서 원문은 미래시제가 아니라 현재시제로 되어 있는 것일까? 이 현재시제의 원문 내용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것을 근거로 삭개오를 이미 변화 받은 상태로 해석하는 주장들이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분이시란 점(10절)과 삭개오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비난(7절)의 내용을 참조해볼 때 그것은 옳은 해석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현재시제는 오히려 삭개오의 믿음과 회개를 반영하는 열매로서의 확실한 결단과 회심과 변화의 마음을 리얼하게 그려주는 것으로 봐야 한다. 말이 아니라 제자도에 관한 확고한 실천의 마음을 현재형으로 저자가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 3:8)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