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우 목사.
(Photo : ) ▲이창우 목사.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키에르케고어는 성경을 '사랑의 편지'라고 합니다. 필자도 이 해석에 뜻을 같이 합니다만 많은 사람들, 특히 신학생들은 성경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여러가지 방법으로 성경을 해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만 성경을 읽어내는 것은 '거울 사업'을 완전히 망치는 결과를 낳습니다.

거울을 관찰만 하는 것이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니듯,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거울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 얻기, 거울에 묻은 더러움 닦아내기 등과 같은 작업 역시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의 말씀 해석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말씀 읽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것이야말로 거울을 보는 행위이듯,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말씀을 읽고 있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바로 이때 말씀이 우리를 해석해 주지요!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린다(약 1:22-24)."

사도에 의하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보고 난 다음 바로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린 자와 같다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 속의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즉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나자마자 첫눈에 반해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된 남녀가 있습니다. 그들은 짧은 일정의 국제회의를 마치고 바로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의 언어가 서로 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러시아어로 쓰여진 여인의 편지가 한국에 도착합니다. 러시아어를 알지 못하는 젊은이는 애인의 편지로 인해 고민에 빠집니다. 어떤 아름답고 귀한 사랑의 언어가 담겨있는지 알 수 없는 편지를 아무에게나 번역해 달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번역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러시아 사전과 문법책을 샀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번역을 시작합니다. 그때 그의 친구가 집에 놀러 옵니다.

"자네,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보면 모르겠나. 전에는 관심도 갖지 않았던 러시아어 편지를 번역하고 있다고!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해 미칠 지경이야! 그러나 그래도 난 이 편지를 해석해야 하는데 자네가 있으면 방해가 되니까, 다음에 다시 찾아와 주겠나?"

드디어 그는 번역 작업을 마쳤습니다. 번역을 끝내고, 그는 앉아서 애인의 편지 읽기를 시도합니다.

"음, 집에 갑자기 누군가 들어올지도 몰라. 또 그 친구가 와서 방해할 수도 있지. 문을 걸어 잠가야겠어."

이 사람의 행동 중 같지만 다른 것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는 '읽기'와 '읽기'를 구별했습니다. 즉, 번역을 하기 위해 읽는 것과 애인의 편지 그 자체를 읽는 것을 구별했지요?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이렇게 해야 합니다. 학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가 번역을 하는 동안에는 해석이 안 되어 너무도 답답한 나머지, 피가 거꾸로 솟고 사전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번역을 끝낸 애인의 편지를 읽기 시작할 때는 사랑의 언어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놓칠까 걱정돼 문을 꼭꼭 걸어 잠가야 했지요. 바로 이겁니다.

여러분 중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편지를 받아본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때 여러분은 그 사랑의 편지를 어디에서 읽었습니까? 조용한 곳을 찾아 혼자서 애인의 편지를 읽습니다. 사람들과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애인의 편지를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귀하고 아름다운 그 사랑의 편지를 올바로 대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하나님 말씀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편지임을 생각한다면, 진지하지 못한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그 말씀을 바르게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적 성경 읽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문적 읽기로만 끝나는 것은 진정한 성경 읽기가 아님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해석해 주는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어디입니까? 바로 골방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편지를 골방에 가서 홀로 읽듯,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자신이 홀로 대면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사전도, 문법책도 필요 없습니다. 주석서도 필요 없습니다. 거기서는 오직 주님의 말씀과 나 자신만 대면할 뿐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만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말씀은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낱낱이 밝힙니다! 이런 말씀 앞에 설 때, 나 자신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다시, 애인의 편지로 돌아갑시다. 편지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가니 공항으로 마중 나와 주세요. 한국에 가면 맵지 않은 전통 한국 음식을 맛보고 싶고, 한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함께 여행을 다니고 싶어요."

편지가 러시아어로 쓰여 있다 보니 모든 것을 다 해석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소원이 담겨 있는지는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애인의 소원을 '행하기' 위해 즉시 떠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그를 붙들어 매는 애매한 구절 하나까지 다 해석한 후에야 비로소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어느 날 여인이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할 겁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가 상대의 편지를 잘못 해석하여 잘못된 소원을 행했다고 칩시다. 공항에 마중은 나갔지만 만나기로 한 장소를 찾지 못해 헤맸지요. 애인에게 맛있는 전통 음식은커녕, 매운 음식을 대접했다 당황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잘못 이해한 소원이라도 "행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혹은 이 남성이 편지 중의 애매한 구절에 붙들려, 애인에게 소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앉아서 그것을 해석하는 데만 빠져 있었다 칩시다. 그는 공항에 마중도 나가지 않았고, 따라서 그 이후 어떤 소원에도 행위로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심히 해석만 하고 있었지요. 애인은 그녀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의 어떤 행동에 더 크게 실망했을까요?

당신은 어쩌면 성서 해석자도, 신학자도 아닐 겁니다. 실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대하는 데에 더 가까이 있을 겁니다. 당신은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이 남성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성경 본문을 이해한 곳이 있습니까? 행하기 위해 즉시 떠나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이 애인의 편지를 편지답게 해석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붙들어 매야 하는 구절은 애매한 구절이 아니라 이미 이해한 구절입니다.

객관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의 연애편지를 몰래 읽어본 경험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절절한 사랑의 문장이라도, 유치한 희극 대본처럼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한 채 어쩌면 키득대면서 읽었을 겁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만 읽을 때, 이와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는 걸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감동도, 어떤 은혜도, 어떤 변화도, 어떤 두려움과 떨림도 없지 않기를, 말씀이 해석해 주는 나 자신을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 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