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인가, 제자인가

카일 아이들먼 | 두란노 | 304쪽

첫 장부터 성도들에겐 인기 없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신앙의 연수가 아니라 헌신의 깊이다." 교회 내의 기득권(?)을 무시하는 발언으로 시작하는 저자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인기 얻는 것을 포기합니다. 솔직히 목사로서 '담요 신학(교회가 성도들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 주려고 애쓰고, 건강과 부를 약속하며 불편한 내용을 빼 버리는 것)'을 말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날마다 죽어야 하는 '십자가 신학'을 강조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는 쓰러진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3만명이 몰려올 교회에서 멋진 설교를 해야 할 텐데....' 하지만 부담감만 가득하고 영감은 생기지 않습니다. 눈앞에 성경책이 한 권 있는데 어디를 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요한복음 6장을 읽게 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5천명 이상이 몰렸고 인기는 하늘을 찌릅니다. 그런데 밥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 한 소년이 떡 다섯 덩어리와 생선 두 마리를 드렸고 모두가 풍성히 먹습니다. 이 기적을 체험한 5천명은 저녁식사가 끝났는데도 떠나지 않고 텐트를 치고 말씀을 듣습니다. 대단한 팬들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자들과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단순히 '팬(fan)'이라는 것을 아시기에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갑자기 예수님의 메뉴판에서 산해진미와 뷔페가 사라졌고, 떡 하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 건데, 결론은 이렇게 펼쳐집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제자라고 자부했던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산해진미가 아니라고 말씀하는 순간 떠났습니다.

저자는 이 말씀을 읽으며 성경을 내려놓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제자의 길을 전할 때마다 최대한 매력적이고 편안하고 편리한 길로 포장하려 애썼습니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제자의 길로 동참할 것이라고 합리화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요한복음 6장의 무리 중 한 명(자신)이 쓴 것이라고 말하며, 용서보다는 회개를, 구원보다는 항복을, 행복보다는 실패를, 삶보다는 죽음을 더 많이 이야기하겠다고 말합니다. 정말 대책 없는 목사입니다. 시선이나 인기 이런 것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책 없는 목사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아려옵니다. 내 이야기이고, 성도들의 이야기이고, 이 땅의 교회 이야기이기 때문에....

저자는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닌 것, 자동차 뒤에 물고기 스티커 붙인 것, 휴대전화 벨소리가 가스펠송인 것, 부모나 조부모가 제직인 것 등으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DTR(Define the Relationship·관계 정립)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제자'가 아니라 '팬(fan)'이라고 정의합니다. 팬은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온몸에 페인트칠을 하고, 선수가 사인한 운동 셔츠를 벽에 걸어두고 운동장에서 열심히 응원을 하죠. 하지만 정작 경기에는 나서지 않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거나 공을 차지 않습니다. 고함을 지르며 응원하지만 경기를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응원하는 팀이 자꾸 패하면 그렇게 좋아하던 마음이 조금씩 식어가고, 심지어는 다른 팀으로 옮겨 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읽을수록 '경기장'이 아니라, '교회'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예수님 주변에도 팬이 많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예수님을 응원하지만, 반대 상황에 이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돌려 (세상의) 다른 선수에게 들러 붙습니다. 안전한 관람석에 앉아 응원만 할 줄 알지, 경기장에서 필요한 희생과 고통은 조금도 모릅니다. 예수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어도, 그분을 개인적(인격적)으로 알거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팬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은 절대적으로 제자라고 확신하며 삽니다.

이 모습은 다른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 내 모습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며 교회 공동체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의외로 교회 안에 많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불신자들에게 종교적 호감도를 물었을 때 천주교, 불교와 너무 큰 격차로 기독교가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이름이 바닥에 떨어진 겁니다. 경기장에서 뛰지 않고 구경하는 팬들만 넘칠 때, 이 모습은 변화가 없을 겁니다. 반대로 상황을 아파하며 내가 뛸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반드시 경기는 역전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저자는 '팬인가 제자인가를 진단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①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로만 고백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실제로 따르고 있는가?

저자가 목회하는 교회로 메일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등록 교인 명부에서 빼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이유는 "카일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였습니다. 전화를 해서 "안녕하세요, 카일 아이들먼 목사입니다. 제 설교가 싫어서 교회를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목사님의 설교가 제 삶을 뒤흔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라며 횡설수설하는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열렬한 팬이죠.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라는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주일마다 교회에 가는 건 괜찮습니다. 식사기도도 열심히 할 마음이 있습니다. 심지어 범퍼에 물고기 스티커를 붙이라 하시면 당장 사서 붙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제 삶이 방해를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은 참 기뻤다고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 마음에 조금이라도 합당한 설교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②예수님에 관해서 아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가?

팬은 지식과 친밀함을 혼동합니다. 예수님에 관해 아는 것과 그분을 진정으로 아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거죠. 교회 안에도 팬이 수두룩합니다. 지식만 쌓을 뿐,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쏟아낸 적이 있으신가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 사랑의 표현을 해 봤습니까? 창피를 무릅쓰고 예수님께 애정을 표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다시 말해 예수님에 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③예수님은 여러 애인 중 한 명인가? 아니면 하나 뿐인 애인인가?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앞으로 더 깊이 사랑하며 살아요. 단 딱 하나 조건이 있어요. 계속해서 다른 사람과도 연애하고 싶어요." 이것이 팬이 예수님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 중에 좀 나은 팬은 예수님을 여러 애인 중 가장 아끼는 애인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관계를 원하시는지 분명히 못을 박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단 하나 뿐인 애인이 되고자 하십니다.

④안보다 밖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조문만 지킬 뿐 그 정신은 놓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할 때마다 트집을 잡았는데, 교회 안에 이런 법만 따지는 팬이 득실거린다면...,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⑤자기 힘을 믿는 팬인가? 성령 충만한 제자인가?

자기 약점을 훤히 드러내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팬들은 좀처럼 약점을 인정하지 못하고, 약점을 철저히 숨기고 강점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떠벌립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 순간, 회개함으로 비워야 성령을 채울 공간이 열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눴는데 제목이 이렇습니다. Part 1(가장 행복한 부르심: 나를 따르라), Part 2(가장 고통스런 부르심: 자기를 부인하라), Part 3(가장 충격적인 부르심: 와서 죽으라). 세 명령 모두 만만치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는데, 고교 시절 읽은 윌리엄 보든(William Borden)의 전기(傳記) 때문이라고 합니다. 억만장자의 삶을 버리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슬람 땅으로 떠난 그의 세 가지 모토는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남김 없이(No Reserves)
후퇴 없이(No Retreats)
후회 없이(No Regrets)

윌리엄 보든은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제자'로 기억될 것이고, 저자 자신도 그렇게 살기를 소원한다고 말하며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떤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윌리엄처럼 살고 있는가? 전부를 걸고서 예수님을 따르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 무엇이라 답하시겠습니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사랑합니다. 하늘뜻섬김지기 이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