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2일 목요일 저녁 7시.
가산동에 이전해서 오늘 이전 감사예배를 드린 컴미션(come mission) 한국본부.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몇몇 사람들이 분주했다.
잠시 후면 거기서 우리 교회에서 자란 한 형제가 결혼예식을 거행한다. 부산에서 선교훈련을 받기 위해 올라온 한 자매와. 그런데 그 결혼식은 여러 가지로 낯설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결혼식. 예식장도 교회도 아닌 선교 사무실. 그것도 저녁 시간에. 너무나 초라할 정도로 조용한 분위기.
시간이 다가오는데 하객들이 몇 없었다. 신부 아버지는 부산에 살고 계신데 아예 올라오지도 않았다. 이 결혼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다.
식장 앞쪽에 홀로 앉은 친정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계셨다. 나는 다가가서 인사를 나눴다. "마음이 많이 아프셨죠? 올라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그 인사를 해야 하는 나도 마음이 아팠다. 너무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형제이다. 그는 새 엄마를 두었기에 화목한 분위기를 잘 모른다. 어릴 때부터 상처를 갖고 자랐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결혼식이 가슴이 아팠다.
아직 신랑 부모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하객들도 별로 없었다. 결혼식이 시작될 즈음, 신랑 부모님이 앞자리로 오셨다. 둘러보니 가족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교회에서 청년들이 자리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선교훈련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참석했다. 이윽고 좁은 결혼식장은 어지간히 찼다.
결혼식 주례는 선교사 세계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이재환 선교사님이 해 주었다. 의미 있고 아름답고 영광된 결혼식이란다. 성경에 나오는 결혼식도 저녁에 이루어졌는데, 성경적이라고 설명했다. 호화판으로 낭비하는 오늘날 결혼식에 비해 무척 값진 결혼식이란다.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결혼식이었다. 주례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결혼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결혼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신비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결혼은 죽음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죽어 하나를 만들어가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를 당부했다.
신랑과 신부가 반지를 나누고 서로 서약했다. 그리고 즐거운 축하 시간이 시작되었다. 순간 20여명의 선교사 후보생들이 우르르 나와서 축하곡을 불러주었다. 감명 깊은 축가였다. 또 하나의 축가가 이어졌다. 한 형제가 나와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곡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찬양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세대에게 맞는, 생기발랄한 댄싱이었다. 모든 하객들이 배꼽을 잡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또 하나의 축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타를 들고 나온 형제는 컴미션 파송으로 캄보디아에서 사역하다 며칠 전 도착했다. 그 청년 역시 우리 교회 출신이다. 그는 친구를 위해 자작곡을 준비해 주었다. 모두가 웃음 가득한 노래로. 우리 모두는 선교사 후보생 부부를 생각하며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를 찬양했다.
이제 내가 나가서 축도를 할 시간이다. 나는 주례자에게 양해를 얻어 한 마디 하게 되었다. 최근 나는 신랑 때문에 마음이 좀 속생했노라고. 갑작스레 선교를 가겠다고 해서. 급작스레 결혼을 한다고 해서. 그런데 그게 영적 아비의 마음이라고. 결혼식 소식을 가져온 두 사람에게 '왜 교회를 두고 선교센터에서 결혼하느냐'고 나무랐노라고.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알게 되었노라고. 우리 교회가 20억에 밀렸노라고. 20억의 선교센터로 이전해서 이전 감사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시간이냐고. 그리고 속상했던 마음도 다 해소되었노라고.
미친 사람들로 가득한 이 자리에 오니 정상적인 내가 이상해졌노라고. 색다른 길을 걸어가기로 결단한 분들에게 그럴 듯한 선택이라고. 그런데 지금도 내 아들과 딸이 이렇게 결혼한다고 하면 나는 자신이 없노라고.
하객들은 함께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 주었다. 누군가 친정 아버지가 빈 가족사진에 나를 밀어 넣었다. 사람들이 보면 친정 아버지라 착각할 가족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왔다. 익숙지 않은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나는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성탄하신 예수님이 생각났다. 예수님은 무모하게 선교지로 오셨다.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고. 그 누구라도 반대할 이 땅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베들레헴 땅 마굿간으로.
그런데 그 분이 우리를 가라고 하신다. 땅끝으로. 각자의 사명지로. 그래서 이 청년들은 이렇게 결혼을 하는 것일까? 집안에서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선교현장으로 나가려 하는 걸까? 아무런 대책도 없이. 평신도 선교사로.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데.
순간 나는, 그런 용기를 갖는 청년들이 부럽기도 했다. 물론 지금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해도 하지 않겠지만. 내 아들과 딸이 그런 길을 선택한다면 또다시 만류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무모하게 나아가려는 그들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성탄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이다. 나는 누구를 찾아가고 있는 걸까? 그런데 나는 너무 생각이 많은 건 아닐까? 너무 이성적으로 계산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결국 우리 모두에게, 지금도 역시 주님처럼 무모한 선교지로의 달려감은 쉽지 않겠지? 그렇다면 성탄절을 잘 맞이하는 것이 맞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