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불변의 진리가 있다. 먼저 '사람이 희망이다'는 말이 그렇다. 사람에게 희망을 두는 사회가 아름답다.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 서로를 믿어주는 사회는 아직까지 희망이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불변의 진리가 있다. '사람에게 기대할 건 없다.' 서로 충돌되는 말 같지만, 어느 정도 인생길을 걸어본 자는 누구나 동감하는 말이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한다. 그렇게 기대했던 사람들에게서 불신 덩어리들이 우수수 떨어져서 실망한다.

그러니 성경은 말하지 않던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타락한 인류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 그런대로 봐줄 만하지 않던가?

신사의 나라 영국. 그렇지만 거기에 신사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어디나 그렇듯 영국도 품격을 흐려놓는 몇몇 사람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도덕성을 내던진 몇몇 사람들에 의해 공동체가 평가절하받는 아픔과 모순을 경험하고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도 해가 질 때가 있다. 대영제국의 영광과 찬란함도 결코 영원한 건 아니다. 해가 질 때가 있다. 달이 떠오르고 별이 총총히 뜬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그 어떤 자랑거리도 영원하지 않고, 그 어떤 영광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최근 영국에서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현대판 노예가 속출한 것이다. 그것도 30년 동안이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국 런던의 어느 가정집이다. 거기에는 주인 부부와 함께 말레이시아, 아일랜드, 영국 출신의 여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온한 것 같고 자유로운 것 같다. 그러나 그 안에서는 끔찍하고 잔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겉보기와 속이 전혀 다른 세계였다.

이 여인들은 30년 동안 감금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정신적·신체적 학대를 받으며 살아왔다. 두들겨 맞는 게 그들의 일상이 되었다. 주인의 허락 없이는 자유롭게 외출할 수도 없었다. 철저하게 통제된 삶은 다른 곳에 관심을 두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단지 일의 노예일 뿐이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세뇌라는 '보이지 않는 수갑'이 이들의 삶을 이토록 비참하게 감금시켰다. 그들은 끊임없이 세뇌되어 왔다. '너는 노예야!'라고. 한 번 두 번, 끊임없이 반복된 말은 그들을 생각의 자유인으로 내버려두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단단하게 속박당하는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세뇌에 포로된 그들은 감옥 같은 집에서 감히 탈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품지 못하고 살아왔다.

자유와 질서가 존중되던 영국 땅을 오명으로 물들이고, 국가적인 품격을 추락시키는 악을 저지르고 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이런 사람들로 인해 공동체는 오염되고 있다.

한 사람의 인격을 마구 짓밟는 파렴치한들은 영국 땅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의 존재 가치를 무시하는 사람들로 인해 어떤 이들은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받고 있다. 때로는 말로 그들을 아프게 만들고, 때로는 표정으로 그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폭행으로 다른 사람들의 몸과 정서적인 가해를 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 전 의붓딸에게 소금밥을 강제로 먹여 나트륨 중독으로 숨지게 한 계모 때문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소금밥이 먹기 싫어 토하면 폭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토하는 딸에게 토사물까지 먹게 했다니, 이게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일인가?

그런가 하면 미성년자 딸들을 상습적으로 폭행한 친아버지도 있다. 술주정하는 아버지를 싫어할 것은 당연한 터. 딸은 아버지의 술주정이 싫어 듣지 않으려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딸의 온몸을 걷어찼다.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있다면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지 않은가?

세상에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마치 인간의 도리를 시궁창에 내던지고 악마의 속삭임을 들으며 희희덕거리는 듯하다.

그릇에도 그릇 나름이다. 수많은 그릇이 있지만, 격이 동일하지는 않다. 아주 귀하게 쓰이는 그릇이 있다. 그러나 보잘 것 없이 천하게 내둘리는 그릇도 있다.

삶에도 격이 있다. 저질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은 결코 저런 것이 아닌데, 쓸모없는 삶으로 스스로를 전락시킨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보잘것없는 삶이었지만 자신의 주가를 높여가면서 격조 높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같은 이름의 물건이라도 그 품질에 상하(上下)가 있듯이, 사람의 품격에도 상하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오면 어떤 사람의 품격을 하(下)라고 할 수 있습니까?"

"생각이 짧아 언행이 경망스럽고 욕심에 따라 사는 사람을 하지하(下之下)라 할 수 있지."

"그렇다면 그보다 조금 나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옵니까?"

"재물과 지위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의 품격은 하(下)라 할 수 있고, 지식과 기술에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중(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다면 상(上)의 품격을 지닌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분복에 만족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의 품격을 중상(中上)이라 할 수 있으며, 덕과 정(情)을 지니고 지혜롭게 사는 사람의 품격을 상(上)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상지상(上之上)의 품격을 지닌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살아 있음을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이 목전에 닥친다 해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으며, 그것이 천명이라 여기고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히 상지상의 품격을 지닌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지상의 격을 갖고 사는 사람이 아니다. 천상의 격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품질에 엄연한 차이가 있다. 작금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격조 있는 삶을 생각해 본다. 주님은 우리가 격(格)에 맞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스스로 격을 떨어뜨림으로 세상의 핀잔거리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격조 높은 삶을 살아야 할 일차적인 사람이 바로 목회자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격조 높은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한국교회를 향해 호소하고 싶다.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품격을 높여가자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걸 맞는 삶을 살려고 애썼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더하지 않겠는가? 품격 없는 사람을 보면 토하여 내치고 싶듯, 예수님도 그러실 수 있다. 내침 당하는 교회가 되지 않으려면 이제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높여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스스로 냉철하게 품격을 점검해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