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勢)를 구축하기 위해서 단체를 만들고 집단을 형성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은 한국사회를 끊임없이 분열 시키며 사람들을 배타적 집단 이기주의에 빠뜨리고 있다.
일단 그 집단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모든게 용서가 되며 이뻐 보이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겐 맹목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이 우리들의 심리이다. 결국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또는 그 지역사회를 위한 사명감으로 발족될 수 밖에는 없었노라고 출사표를 던졌던 그 많은 단체들의 속내는 자신들의 사회적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야망만이 존재하고 있음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한국의 그 수많은 정당들이 그러했고 근래에 들어서는 많은 시민단체들의 정체가 그런 모습들로 드러나고 있다.
물론 오랜세월 자신이 좋아서 했던 일들이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하나 둘, 뜻을 함께 하고픈 사람들이 모여들며 더욱 많은 일들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며 발전해 나가는 오랜 관록의 단체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그런 단체는 세월이 가도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끄덕없이 자신들의 사명을 묵묵히, 그리고 아주 투명하게 수행해 나간다.
하지만 한국인의 성급함과 경쟁심리가 보여주는 판 새로짜기의 정치적 행태는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당의 이름을 갈아 치우는 그 참을수 없는 가벼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자신들의 역사를 진부한 구태정치로만 인식하려는 부정적 심리에 빠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욕구중에 사회참여의 욕구가 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위한 기본적 욕구충족을 어느정도는 만족시킨 사람들이 이제는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그 사회를 위해서 뭔가 봉사하고자하는 그 다음 단계의 상위의 욕구이다.
제대로 배우고 안정된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고차원적 욕구에 대해서 무조건 달성해야 하는 삶의 목적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과연 그 사회를 위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그리고 그 사회가 그 역할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인지에 대한 당위성을 심사숙고하는 신중함을 잃지 않않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사람이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한 모든 역할을 다 경험해 보고싶은 절제되지 않는 삶의 강박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수 없다. 국회의원이 장관되고 싶고 장관되면 대통령을 꿈꿔보려는 야심가들이 득세하는 여의도 정치판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남보기에 좋아 보이고 남보다 더 각광받는 역할에대한 우리 사회의 목마름이 만들어 내고있는 강박적 심리임을 어찌하랴. 최근, 한국의 여야가 국정원 댓글사건과 노무현 정부의 정상회담 회의록 원본실종의 사태에 매달리며 정쟁을 일삼고 있는 가운데 그렇지 않아도 국회입성이후 자신의 존재감이 희미해 져 갔던 안철수 의원이 때는 이때다 하며 결연한 의지로 신당 창당의 출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그의 주장으로는 '새 정치 구현'이다. 지금까지 보여주는 한국의 정치현실이 어디 그럴듯한 정당이 없어서 혼란 스러웠단 말인가? 그 나라의 가치관과 정서속에서 성장한 인재들이 새로운 당을 만든다 한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문제는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패거리 정치에 편승하지 않고 소신껏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제대로 된 정치인이 없었다는 데에 원인이 있지 않겠는가?
새로운 정치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회참여와 자아실현의 욕구가 자신의 공명심을 체우기에 급급한 미성숙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혼란의 정치가 아니고 사실은 오직 자신이 몸담고 있는 그 지역과 국가에 대한 공헌과 기여를 할수있는 제대로 된 사람들의 가치관이 만들어 내는 정치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 혹세무민하며 자신의 세를 불리려 하는 사람들이 득세할 때 그것은 차라리 혼자서 묵묵히 농사 지으며 살아가는 어느 촌노(村老)의 삶보다도 못한 사회적 독소가 아닐까 싶다.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며 일종의 삶의 발판을 구축하려는 우리들의 심리! 그것이 단지 자신의 삶을 만족하기 위한 난리법석쯤은 아닐지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내 자신을 살펴 보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