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1월에 시베리아 지방에 흩어진 조선 각 교회에 선교사로 파송 받은 박정찬 목사. 그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하여 1919년에 귀국하였다니 길면 2년간 짧으면 1년간 시베리아 선교사로 사역한 셈이다. 그런데 귀국한 지 6년 후인 1925년에 다시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 받아 1926년까지 약 1년간을 사역하였다. 같은 시베리아를 두 번이나 파송 받았음으로 그의 인품과 신품이 고상하였다고 보아도 억지가 아니다. 그가 사역한 시베리아 지역은 해삼위로 불렸던 곳으로 조선인들이 흩어져 거주하면서 교회를 세운 지역이다. 그렇다면 조선 각 교회를 순회하며 조선인을 위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상담하며 위로하고 격려했다고 보면 된다. 나라를 잃고 북으로 떠난 저들은 박정찬 목사의 복음을 통하여 힘을 얻어 살아갈 기운을 되찾고 믿음으로 천국을 소망했음은 불 보듯 뻔한 사실이다. 위의 지역은 당시 함경노회 소속이었음으로 캐나다 선교 구역이 되겠다. 그런데 박정찬의 해외선교는 중국 간도까지 이어진다. 1929년에 아들 박예헌 목사와 함께 간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의 말년에도 길림성 용정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박정찬 朴禎燦 목사는 1862년 8월 12일 평안남도 용원군 용흥면 안연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박정찬은 어린 나이에 한학을 공부하고 기독교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청년시절에 농감장의라는 말단 관직도 가진 바 있다.
박정찬이 예수를 믿게 되는 동기에 대하여 대구제일교회 110년사는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지방 이속들이 공금이나 관곡을 사사로이 쓰고 도망치거나 죽었을 때 그 일족에게 대신 물게 하던 소위 족징으로 인하여 부유한 집안 살림이 파산되었고, 설상가상 괴질에 걸린 가족 6, 7명이 사망하는 가운데 실의에 찬 박정찬에게 외숙부 김덕권이 준 한문성경이 큰 희망으로 성큼 다가왔던 것이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데는 바로 그 한문성경이었다. 둘째는 부친을 체포한 관원을 효심에 죽인 박정찬이 도피한 평양에서 1899년 9월에 사무엘 마펫의 세례를 받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 교인이 되었다.
예수를 믿은 박정찬은 평양 남문밖 교회 교인이 되더니 1900년에는 매서인으로 변신한다. 평양 서북 지방인 순안, 숙천, 안주, 박천, 영변, 맹산, 강동, 은산, 순천 등지를 걸어 성경을 팔고 복음을 전하였다. 5년 후인 1905년에는 평양 남문밖교회의 조사로 시무하더니 익년에는 장로로 장립하였다. 1907년에 아들 박예헌과 함께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니 예수 믿은 지 8년째가 된다. 신학교 재학 시 충북 청주읍 교회 조사로 시무하던 그가 본 교회에 당회를 성립하고 조직교회가 되게 하였으나 그의 장로직이 한 업적이다. 3년 후인 1910년에 제3회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선 장로회 선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박정찬은 1910년 신학교 재학 중 조사로 시무하던 충북 청주읍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했고, 본 교회 뿐만 아니라 충북 내의 최초 조선인 목사라는 영예를 얻었다. 500명의 좌석을 둔 큰 예배당을 건축하고 인근 북일면에 오죽교회를 개척하는 등 혼신을 다하였던 박정찬은 1912년에 1년간 휴직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912년 11월에 서울 남대문 교회가 청빙하더니 박정찬은 본 교회 초대 목사로 부임하여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받던 1917년까지 사역을 계속했다. 1차 귀국한 박정찬은 마산 문창교회에서 약 5년간 목회했다고 문창교회 85년사가 기록하고 있다. 문창교회 목회 시절 박정찬이 그의 과거 치적을 볼 때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부총회장을 역임할 만하다.
1919년 9월 2일 서울역에 도착한 신임 사이또 총독에게 강우규 열사가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박정찬이 원산 예배당과 서울 관철동 신행여관에서 수차 강우규를 만난 사실이 경찰 조사 결과 밝혀짐에 따라 함경남도 원산부 광석동 28번지에서 58세의 나이로 체포되었다. 강우규를 격려하고 지도하였다는 혐의다. 주님을 사랑하면 나라도 겨레도 사랑하게 된다는 공식은 마틴 루터에게서도 나타나듯 먼저 예수, 그리고 게르만 민족이라는 서식에서 조선 민족이 대두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베리아 선교지에서 2차 귀국한 박정찬은 대구 제일교회에 부임했다. 1926년 7월 11일의 일이다. 그는 1929년 12월 29일까지 약 3년 5개월간 위임목사로 시무하였다. 박정찬은 대구 제일교회가 이른 바 자치파동의 법정 시비로 이어진 시련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기를 원했던 임종하, 박문찬 등 2분의 전임 목사에 이어 본 교회를 목회한 교역자였다고 대구제일교회 110년사는 감사한다. 선교 사역을 놓지 않던 박정찬이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니 향년 8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