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구름에 가려진 하늘은 더욱 을씨년스럽다. 그것을 배경으로 광풍이 휘몰아친다. 그 광풍으로 인해 세상의 온갖 티끌도 덩달아 바람결에 따라 미친듯 솟아 올라 한바탕 난동부린다. 물리적 환경의 기상도가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영적 기상도다.
‘을씨년스럽다’란 말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을사늑약’이 1905년 강제되면서 백성들의 침울한 마음 상태를 어수선하고 흐린 날씨에 빗대어 ‘을사년스럽다’고 표현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세상 속에서 복음적 가치의 퇴조가 마치 을씨년스럽게 진행되고 있어서 한 말이다.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부상한 이후, 지금처럼 기독교적 가치가 도전 받은 때가 있었던가? 21세기는 총성이 울리지 않는 거대한 가치 전쟁터이다.
불안한 느긋함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서적 가치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의 에토스(ethos)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복음적 가치다. 기독교적 가치를 다시 꺼낸 이유는 그것이 서구 사회의 정신적 주춧돌 역할을 하던 때를 막연히 그리워함이 아니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를 타고서 망망대해를 헤매는 표류자의 심정에서 하는 말이다. 복음적 가치를 동력으로 하여 항해하던 배가 갑자기 거친 세속의 난류(亂流)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심지어 동력도 나가 버린 상황이 된 듯 혼란스럽다. 그것을 거슬러 순항하지 못하면 결국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질 터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오히려 절박하지 않다. 오히려 느긋하다. 이 느긋함이 불안하다. 다만 이 불안함을 의연히 떨쳐 버리지 못하는 믿음의 부족을 탓해야 할까? 아니면 복음적 가치를 뭉갤듯 돌아가는 악한 역사의 맷돌이 너무나 천천히 돌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지 못함인가?
거대 서사를 잃어버린 포스트모던 사회
정보 혁명의 전세계화가 시작된 1957년을 기점으로 세계는 산업사회에서 후기 산업사회로 이전하였다. 이러한 이전과 함께 탈중심적 다원주의와 탈이성적 사고를 그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느덧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에 그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사회는 성서가 선포하고 있는 복음적 가치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왜 그러한가?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를 부정하면서 분열과 해체를 지향하는 사조이다. 절대 진리의 해체는 동시에 가치의 무의미성으로 치닫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대한 서사들의 종말”이라고 정의했다. 거대한 서사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 왜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계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형이상학적인 커다란 이야기, 즉 거대 담론을 뜻한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더 이상 어떠한 거대 서사들도 설 자리를 잃어버린 시대라고 정의했고, 이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큰 특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거대 서사들 가운데 하나가 서구의 2천 년 역사를 지배해 온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 이야기다. 인류를 위해 십자가 상에서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그분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음과 그 가치가 도전당할 뿐만 아니라 다른 가치로 대체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포스트모던 사회로 진입하면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방향과 살아야 할 목적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기술사회 속에서 점차로 인간은 최대의 이익과 실용과 기계적인 효율의 논리에 지배를 받게 되었다. 컴퓨터의 2진법 언어로 처리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언어들은 컴퓨터로 처리할 수 없으므로 무시되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만다. 즉 성스런 신비, 윤리, 도덕, 목적, 당위성, 의미와 관계된 언어들은 점차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 대신 효율성, 능률성, 가능성, 적합성, 실용성과 이해관계만이 중심이 되는 세계가 건설되고 있다.
거대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서 퇴폐적인 감각 문화,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케 하는 자극적인 영상 문화, 즉흥적인 인스턴트 문화, 인간을 사회의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소외 문화가 비온 뒤 버섯처럼 자라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권위와 전통에 대한 거센 도전이다. 성서와 교회에 대한 도전 또한 매섭다. 더불어 복음적 가치에 대한 거센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대 담론을 잃어버린 세대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세상은 실용성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삭막한 모래 바람이 부는 사막을 항해하는 느낌이고 , 망망대해에서 표류한 배에 승선한 느낌이다.
복음적 가치, 포스트모던 사회를 항해하는 교회의 밸러스트
상황이 이러할진데, 교회마저 기술적인 매뉴얼의 언어로 무장하고 복음적 영성이 빠진 번영의 신학을 강조하고 경쟁적 성장주의와 상업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권 하에 놓여 있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지 않은가? 교회가 기댈 것은 그런 세속적 가치가 아니라 복음적 가치다. 포스트모던적 세상이 혼란스럽게 돌아가는 와중에 교회가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때일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거대 담론이 현대인들의 공허한 마음에 크게 울리는 법이다. 부박한 세상이 되어갈수록 교회는 더욱 복음적 가치를 전해야 한다. 포스트모던 가치가 대세라고 교회가 주눅들 일이 아니다.
이것 저것을 복음과 섞은 유사 복음이 아니라 진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중심을 잡아주는 밸러스트(ballast)가 없는 배로는 거친 바닷길을 항해할 수 없듯이,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상실한 교회는 험난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결국 도태되고 만다. 역사 한가운데서 요동치는 거대한 진자추가 한동안 광포하게 혼란과 죽음을 향해 쏠리겠지만, 언젠가 인류는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들이 저항하고 버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정한 진리임을 깨닫는 날 말이다. 그 진자의 추가 방향을 틀어 생명과 구원의 방향으로 되돌아가고야 만다는 믿음으로 복음적 가치를 선양할 터이다. 광포한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던 예수님이 혼비백산한 제자들을 실은 배 위에 서시자 평온해진 것처럼, 복음적 가치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되심을 믿는 믿음은 교회가 혼란한 세상을 뚫고서 항해할 수 있는 동력이자, 포스트모던적 카오스(chaos)를 잠재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