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량
(Photo : 기독일보) 정인량 목사

불교와 힌두교의 교리중에 카르마가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Karma)는 업(業)의 다른 말로,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중생의 구원에 있어 인간의 행위 곧 카르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이 세계조차 업(業)의 소산이라고 믿고 있는 까닭에 인생사에 있어 깨끗한 생활 곧 선업(善業)을 짓은 일이야 말로 복을 받는 일이다. 그래서 적선(積善)이야말로 불교도에게 있어 최고의 선인 것이다. 반면에 악업(惡業)을 지으면 그 죄과를 고스란히 받는다. 문제는 이생에서 선업을 많이 쌓았다 해서 과거에 지은 악업과 상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가 중생들로 하여금 죄를 지으면 안된다는 메세지를 전하려 왔다는 것이다.

힌두교는 매우 복잡한 종교인 까닭에 한마디로 이렇다 할 수는 없지만 카르마에 있어서는 불교와 조금 다른 의미를 전한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輪廻)와 업(業), 해탈(解脫)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힌두의 수많은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하물며 인간에 있어 업의 속박에서 해탈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던 까닭에 출가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중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힌두교에 있어 업에서의 해탈은 제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업의 산스크리트어인 karman은 행하다, 행동하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시작하여 명사형인 karma로 불려서 행위를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은 선하든 선하지 않든간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간에 어떤 행위에 의하여 끊임없이 연결되어지는 어떤 선상에 놓이게 된다고 보는 것으로 자신의 조그마한 행위는 이미 이전에 자신의 행위와 그리고 이후의 자신의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사상이 나오고 아주 강력한 숙명론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인간 스스로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생의 시작하게 되어 이미 자신의 카르마가 자신의 행위로 인한 결과로 보기 보다는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카스트제도에 굴복하고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힌두교가 약간의 힌트를 주었다해서 카르마의 해방을 선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카르마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진정한 구원은 없다.

이에 반하여 기독교는 카르마를 말하지 않고 카리스를 전한다. 즉 은혜이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이다. 엄밀히 말하면, 본래는 죄가 많아서 은총을 입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자애 행위를 말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수여하는 유일 조건임을 누누이 증거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가 행위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업(業/행위)이 없으면 은혜(恩惠)가 필요없는 까닭이다. 즉 카르마가 없다면 카리스가 필요없다. 이 문제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수는 피터지게 싸웠다. 기독교의 사촌쯤이라는 유대교와 이슬람이 카르마를 강조하는 까닭에 사촌이 아니라 불교나 힌두교와 같이 전혀 다른 종교인 것이다. 케톨릭은 카르마와 카리스의 관계를 혼동하고 있어 마틴루터의 오직 카리스에 의해 종교개혁이 단행된 것이다. 백팔번뇌의 업의 문제를 가지고 천배 만배의 고행이나 탁발수도나 동안거나 이런 모든 것이 동원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여전히 인간의 행위로 극복하려고 무진의 애를 쓰는 것 뿐이다. 기독교는 카리스없는 카르마는 전혀 희망이 없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까닭에 무수히 종교적 방황을 계속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카리스없는 카르마를 강조하는 경향이 농후해지고 있다. 오직 카리스!의 말씀이 풍성히 전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