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의 교회 역사 어느 구석을 찾아봐도 피 흘림의 역사 없이 교회가 안착, 성장한 일이 없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자라게 되어 있다. 한국 천주교회라고 예외일 수 없다. 이 교회는 끊임없는 박해와 수난 속에서 피 흘림의 역사를 이어 오면서 교회가 건실하게 성장했다.
그런데 한국천주교회의 박해사는 묘한 대목이 하나 있다. 그것은 조정의 권력 구조의 변화에 따라 박해와 평화의 골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즉 천주교회에 호혜적인 권력 구조에서는 교회가 평화를 맛보며 발전 했고, 적대적 세력이 등장하면 그에 따른 혹독한 박해가 이어졌다. 이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사대부가에 먼저 전래됨으로써, 그들의 권력 투쟁과 연유되어 피해를 받는 구조였다. 물론 처음 접한 서양 문화와 종교가 전통문화와 종교와의 피해 갈 수 없는 갈등도 큰 몫을 한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한국 초기 천주교회가 무수한 피 흘림의 박해를 받은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 종교가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로 오인된 때문이다.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 종교라는 오해였다. 천주교회가 한국에 도래되면서 조상제사를 금하자 천주교 입신자들이 조상제사를 폐지하는 일이 시작됐다.
1785년 음력 4월 사헌부의 관리 유하원은 상소를 올리면서, “천주교는 다만 천(天)이 있는 줄만 알고 임금과 어버이가 있음을 모르며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설로써 백성을 속이고 세상을 의혹케 함이 큰물이나 무서운 짐승의 해보다도 더하다”고 고발했다.
천주교회가 무군(無君)의 종교로 오인된 것은 신부들이 “왕의 명령보다 교황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가르친 데 기인했다. 가톨릭교회는 한 나라의 왕보다 하늘의 주인이시고, 천하를 다스리시는 ‘하늘의 주’ 즉 ‘천주’(天主)님의 명령이 우선한다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서 국왕의 명령과 천주의 명령이 배치될 때는 반드시 천주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왕권의 상대화(相對化)로 당시 상황에서는 혁명적 사고였고, 대단히 위험한 가르침이었다.
유하원의 글에서 예시한 임금과 어버이가 있음을 모른다는 말을 입증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이것이 곧 충청도 진산(珍山)에서 일어난 ‘진산사건’이다. 윤지충(尹持忠)은 사촌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서학에 심취하여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는 천주교회의 가르침대로 전통에 따라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신주(神主)를 즉시 불사르고 제사를 폐지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커다란 비극을 몰고 온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 교회가 조상 제사를 금지한 일이었다. 이 문제는 천주교회가 앞으로 수많은 순교자와 배교자를 속출케 하는 근본적 원인이 됐다. 그러던 중 1791년 윤지충의 모친 권(權)씨가 세상을 떠났다. 신앙심이 돈독한 그는 모친의 사망에 상복을 입고 호곡은 하였으나 시신에 절하거나 위패를 모시지 않았고, 후에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국법과 같이 규정되어 있던 유교의 전통의례를 거부하고 특히 중요 덕목 가운데 하나였던 조상 제사를 폐지하는 행위를 한 셈이었다. 조정에서는 진산 군수 신앙원에게 윤지충, 권상연 두 사람을 체포하여 신문케 했다. 이들은 끝내 배교를 거부하고 목 베임을 당해 순교했는데, 그 때가 1791년 11월로 윤지충이 33세, 권상연이 41세로서 조선 천주교회사에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됐다. 그들의 머리가 떨어진 후 여러 사람들에게 새 종교를 따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군중들에게 5일간 효시(梟示:목을 베어 높이 달아 놓고 뭇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케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인들은 참수형에 처한다는 것이 국법으로 인식되었고, 수많은 교도들이 참수형을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됐다.
제사폐지는 일찍이 중국에서도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근 100년 동안이나 의례(儀禮)의 문제로 심각한 논쟁이 일어난 문제였다. 예수회 소속 마태오 리치(Matteo Ricci)가 1601년 북경에 들어와 전교하면서, 중국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행해 왔던 제사는 단순히 정치적 의식으로 간주하고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기독교도 유교의 발전된 형태라고 선전하여 유교의 상제(上帝)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고 하는 소위 보유론(補儒論)적 입장에서 선교하여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회 소속 선교사들이 들어와 이러한 사실을 간파했고 천주교가 유교와 혼합되어 이상한 기독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란시스코회 선교사들은 교황청에 이 사실을 즉시 보고했다. 1715년 3월 교황 클레멘트(Clement) 11세는 조상 제사 금지에 대한 회칙을 공포했다. 1742년 7월에는 교황 베네딕트(Benedict) 14세 역시 조상 제사를 절대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1773년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조상 제사를 인정한 예수회를 해산시키고 전 세계에 나가 선교하고 있던 수많은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에게 소환령을 내렸다.
북경 주교는 조선 교인들에게 제사, 의식(儀式), 배례(拜禮) 등에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 숭배에 반대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이를 엄격히 금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참으로 수많은 초기 신자들이 걸려 넘어지는 거침돌과 배교의 원인이 됐다. 조상 제사 금지는 유교 전통의 조선사회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반사회적 행위임에 틀림없었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가 무수한 순교의 피를 흘린 이유가 바로 무군무부의 종교라는 이유에서였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타문화권 정착이라는 과정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충돌 중 하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