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환
(Photo : 기독일보) 최윤환 목사.

끌려 다니 시 던 세상 창조의 神, ‘인자의 아들’ 은
가야바의 비열함 수모(受侮)로 받으시던 자리자락.
돌계단은 엉성하게 땅속에 파묻혀
옆으로 얼룩얼룩 열 지어 누었는데
피 땀의 엉킨 마음을
어찌 밟고 끌려 가셨나.

이럴 수가 있을까
맨발로 그 엉성한 돌계단을 밟아
오만한 피조물 인간 가야바의 희롱을 받으려 끌려 오르실 때의
처참함에 찬 그 마음 안쪽은 어떠하였으리.
이 밤, 가슴 조여 오는 나의 송구함에 잠 못 이루는 새벽이여.

수렁 같은 지하수 나무다리 출렁해 디디면서
둥근 원형 바위 문에 들어서니
나지막한 천정과 천여 년 묵은 돌바닥에
수모의 병사 노리게임 판마저 비웃는 자리에
비통의 自由 함을
무언으로 바께 대답할 수 없으셨던 그 자태

최윤환
(Photo : )

나는 무릎으로 더듬으면서
짓눌리는 어거스틴의 참회 보다 더한 맘 시림으로
작은 신음 바닥 되어, 흘러나오는 데

지나 온 얇은 맥박으로 흔들리는
투명의 감수성을
이리 밀리고, 또 저리 떠밀리어
멍든 상처(傷處) 떨구면서
보다 더 또 허물어져야 하는 것이어서

긴 견딤이 지나 서, 싹 오르는 慈愛로움 임을 알아차릴 가..
가슴 열리 우는 시간이, 얼마동안 흐르고
피어오르는 고요가 잔잔히 그리고 또 잔잔하게 흔들릴 때
깊이 파묻혔던 고개를 들어 올 리면서

차츰 열리어 질 구름 사이, 비집는 광채가
줄기 빛으로 빗겨 내려
나의 허리를 둘러 드는 視野에서
무겁게 두 손을 올려듭니다.

그날, 내가 발 디디고 섰던 그 자리, 예수님도 모멸의 발 디딤을 밟으셨던 자리여서, 내 발은 뜨겁고도, 발 내려디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가야바의 집이 올려다 보이고 빌라도가 처음에는 자신이 예수를 재판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차서, 당시 유대인의 왕 대 헤롯과 제사장 가야바에게 자기 앞에 떨어진 무거운 이 재판을 넘겨주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 헤롯과 가야바는 이 계단을 밟고서 자기 앞에 올라 와 선 예수님께 실컷 더 모욕을 퍼 붓고서는 다시 로마 집정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 오가는 길목에 놓여있는, 예수님 밟으셨던 이 모멸의 계단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 발 딛기가 너무 너무 힘들어, 나 자신을 허물어뜨려, 깊이 돌아보게 되는 수 밖에 없어졌던 계단이었습니다.

이 시간, 나는 나도 지난날들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비열해 지는 뜨거운 얼굴을 떨어뜨리게 되는 수 밖에 없는 지금 새벽입니다. 어찌 저 위에 보이던 그 날 그 자리에 섰던, 가야바 집 난간에 서서, 엉성한 저 아래 회색 검정 흙에 듬성듬성 덮여진 돌계단을 내려다 본 기억이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그 날, 나는 내 두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너무 그토록 참혹해져서, 비열함의 몸 가눌 길이 전혀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 구속의 절대적 사명을 스스로 안으시고, 여기 겪어 서셨던 저기 저 모습을, 참아 눈을 뜨고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그날이었습니다. 피조물 인간이 아니 어떻게 이처럼 뻔뻔할 수가 있습니까. 저 가야바와 내가 왜 또 자꾸 이토록 오버랩되어야 하는 것인지, 내 엎드러져 쭈그러진 몸을, 여기 또 가눌 길이 없어 몸서리를 처봅니다. 아무래도 나 인간은 어떻게 더, 어쩔 수가 없는 참혹해지는 비열함, 떼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일까요.

로마의, 유대 자기 나라 정복정치에 협조하면서 대제사장직을 악용하였던 가야바는 두 얼굴을 변술 쓰면서, 진리로 순하셨던 메시야 예수를 처참한 처형에 몰아넣어 가려고 갖은 수단을 다 했던 인물, 빌라도가 이 재판의 죄를 내가 어찌 감당하리요 할 때에, 가야바는 대답했습니다. ‘이 죄는 나와 내 자손들이 담당하겠으니, 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쳐 댔습니다. 사실 때로는 내 속에도 양의 가죽을 덮어 쓰고, 나의 사랑하는 이웃에게까지 가증한 얼굴을 펼 처 드랬었을 것, 자꾸 내 몸뚱어리가 수그러져 들고 말 뿐입니다. ‘왕 중 왕 메시야 예수’는 그래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 이들의 처소를 다 예비하여 놓으시고, <그날, 어느 날> 우리에게 ‘다시 찾아 오시마!’고 약속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