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한인 2세 검사가 1년 동안 미국의 배심재판 제도를 본국에 소개하고, 시애틀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시애틀 타임즈, 킹5 TV 등 미국 언론사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정의를 향한 투지와 열정이 미국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애틀 킹 카운티 스티븐 김 검사ⓒ김브라이언 기자


‘시애틀 킹 카운티 검찰청이 자랑하는 에이스 검사’, ‘시애틀 강력 범죄 재판을 전담하며 100여건의 재판을 승소한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 ‘냉철한 판단력과 포기를 모르는 투지의 남자’등이 스티븐 김(38) 검사에게 붙는 수식어다.

강력범죄 전담 검사로는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미소를 지닌 김 검사를 시애틀의 푸른 바다가 환하게 보이는 라운지에서 만났다.

김 검사는 74년 미국으로 이민 온 김정철 장로와 신영은 권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워싱턴대학(UW) 정치학과에 진학한 성실한 청년은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살림에 자취나 기숙사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같은 대학 로스쿨에 진학한 이후에도 부모가 하는 식당의 카운터에서 법전을 펼쳐놓고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25살이란 젊은 나이에 시애틀 킹 카운티 검사가 됐고, 지금은 12년 경력을 가진 시애틀 검찰청의 베테랑 검사다.

그는 또 한국 법무부의 요청으로 ‘해외 법조인 연구위원’으로 위촉 돼 미국을 대표해 미국의 사법제도를 소개할 정도로 인격과 실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최근엔 정치계과 법조계에서 주목하는 차세대 리더다.

그에게는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특별하다.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사람들의 편견이나 잘못된 인식을 바꾸는 일에도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이하는 일문일답

-매우 온화한 얼굴이다. 강력계 검사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진 않나?


“(웃음)검사라는 직업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50명에서 100명가량 되는 배심원들 앞에서 그들의 생각과 사고를 읽으며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많은 검사들이 배심 재판 1년을 하면 다음 해는 쉬고 싶어 한다. 정신질환을 앓게 된 검사도 있을 정도로 쉽지 않은 직업이다. 논리적 해답과 법적 근거를 찾는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다.”

-킹 카운티 검찰청을 소개해 달라

“킹 카운티에는 검사가 250명가량 된다. 여러 분야의 팀이 있지만 내가 소속된 배심 재판 팀은 25명이다. 10%가량 되는 검사들이 매일 배심 재판을 감당하고 있다.”

-재판에서 승소한 경험이 많은데 비결이 있나?

“대게 재판 과정 중에 배심원 12명 이상을 생각한다. 백인들의 심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양성 가운데서 보편성을 찾고, 논리적 기준과 법적 근거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 일수록 영어를 제대로 사용하고, 재밌게 진행한다. 많은 검사들이 배심재판을 힘들어하는데 12년 동안 끊임없이 경력을 쌓아온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전통적으로 백인이 자리 잡은 법조계라 아시안 검사에 대한 편견 있지 않나?

▲스티븐 김 검사는 대한민국 법 역사상 미국의 배심제도를 정확히 소개하는 책을 영문과 한어로 제작했다.ⓒ김브라이언 기자

“한국 사람으로서 배심원들 앞에 서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백인들은 아시안이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공부만 잘한다고 생각한다.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장사만 잘한다’는 웃지 못 할 편견을 가지고 있다.

한 예로 백인 판사와, 백인 배심원, 백인 청년인 피의자 그리고 동양인 검사. 이런 상황이 종종 연출 된다. 그럼 검사의 의견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백인 청년을 봐주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범행 동기나 과거 이력을 참고해서 범죄자에게 또 기회를 주는 것은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은 특정 인종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 백인들의 심리를 적절히 파악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검사의 역할이다.

많은 사람들이 재판 진행 과정을 보면서 ‘아시안도 검사를 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들의 편견을 깨고 오히려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더 좋아지는 것 같다. 내가 검사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다.”

-검사란 일을 하는데 있어 어떤 기준이 있나?

“사람은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어설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한 번 기회를 주고, 다시 한 번 실수 한다면 더 강화된 프로그램으로 두 번 기회를 줘야 한다.

그럼에도 행동을 고치지 못하면 보호해야 한다. 사회와 사회 구원을 보호해야 하고 범죄자를 보호하기 위한 형량을 부여하는 것이다. 인권과 정의의 균형을 이루고 사회와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태어났는데도 한국말을 굉장히 잘한다. 비결이 있나?

“어릴 때부터 집에서는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만 사용했다. 1970-80년대 이민 1세대들은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집에서도 부모와 자녀 모두 영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들은 생각이 달랐다. 부모님께서는 ‘너는 한국 사람이니까 학교에서는 영어를 사용해도 집에서만은 한국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방학이면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을 모두 외우고 받아쓰는 훈련을 자주 했다.”

-성장하면서 한국어를 잘하기 때문에 얻는 특혜도 있었나?

“사실 성장하면서 한국어를 잘하기 때문에 받는 특혜는 많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한국어를 공부했고 심지에 대학교에서는 한자까지 공부했다.

그런데 한국어를 사용하는 곳은 집이 전부였다. 검사 생활 가운데서도 아주 가끔 피해자가 한국 사람이면,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전부였다. 한국어를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 사용할 곳이 많지 않아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내가 한국어를 공부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한국 법무연수원에서 미국의 사법제도와 배심제도를 소개하며, 한국의 사법시스템 개혁에 밑거름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국 법무원에서 원하던 사람은 배심재판에 대한 경험이 아주 많고 한국말을 잘 하는 검사였는데,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미국에서 내가 유일했다. 한국 법무부를 위해 일했던 한 해 동안 ‘나는 볼 수 없지만,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됐다.”

-한국에서는 한 해 동안 어떤 일을 했나?

“강의를 가장 많이 했다. 한국 법조인을 양성하는 대부분의 로스쿨을 방문해 강의했다. 또 법무 연수원 신임 검사, 부검사 들에게 강의를 많이 했고, 수원에서는 교수, 검사장들과 법무부 원장에게도 강의를 했다.

또 미국의 배심제도를 소개하는 책을 영문과 한어로 제작했다. 미국의 배심제도가 영어와 한국어로 정확히 출간된 적은 대한민국 법 역사상 처음이라고 들었다.”

-바쁘고 힘든 검사 생활에서 나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복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 샌프란시스코에 계신 할머니께서 아침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신다. 올해 100세가 되시는데 매일 아침 일어나셔서 저를 위해 기도해주신다. 그리고 만날 때 마다 ‘항상 겸손하고 주 앞에서 기도하면서 살라’고 말씀해 주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6.25 전쟁 때 북한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피난을 오셨다. 할아버지 다섯 자녀들은 내 아버지를 포함해 모두 장로님과 권사님이 되셨다. 사촌들도 모두 믿음 가운데 생활한다. 가족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고 말씀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시애틀 형제교회를 오래 다녔는데 담임 목사님 말씀에 큰 힘을 얻는다. 많은 사람을 대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사람의 깊은 마음을 보게 되는데, 목사님이 참 따뜻하고 솔직한 분이다.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여주시고 실천하는 모습이 감동이 된다.”

-한인 이민 2세로서 훌륭히 성장했다. 이민 3세인 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하길 바라나?

“한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미국에 많이 정착했다. 그런데 자녀들마저 아메리칸 드림을 쫓는 삶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모의 여유로움이 자녀들의 삶을 망가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족함도 경험하고 어려움도 경험해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나 혼자 잘 사는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자기만의 삶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면 좋겠다.”

-앞으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아직 젊은 나이지만 12년 동안 검사 생활을 하면서 모든 강력범죄 배심재판을 경험해 봤다. 직업을 선택할 때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일이냐’는 것이다.

판사로 나아가는 길도 있을 수 있고 법조계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정치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우선 지금 주어진 검사로서의 일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