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너희는 왜 엄마 말을 듣느냐고? 그랬더니 한 녀석이, 안 그러면 엄마가 angry한다고 대답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진솔한 대답입니다. 엄마에 대한 두려움이 순종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대학 다니는 녀석이 이런 식으로 대답하면 참 곤란할 것입니다. 대학 다니는 녀석이 엄마의 말에 순종하는 까닭은 결코 두려움 때문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혹시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한테 angry할까봐, 그래서 순종한다고,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친다고 대답한다면, 우리의 영적수준은 초등학교 1학년 수준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순종 안하면 천국에 안 들여보낼까봐, 즉 지옥에 갈까봐 하는 두려움 때문에, 순종 안하면 나를 해코지 할까봐, 그런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이라면, 우린 영적으로 초등학생인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에 상장을 받아오면 아버님으로부터 1천원씩 상금(?)을 받았습니다. 그 재미에 공부를 열심히 했고, 특별히 시험을 잘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땐 공부하라고 하는 아버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이유가 1천원 짜리 지폐의 위력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뭔가 상금을 주실 것이라고. 흔히 축복이라는 말로 포장하지요? 즉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데, 이것도 결국은 초등학교 1학년 수준입니다.

좀 우스운 표현이지만 저는 초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가 1천원 짜리 지폐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천원 짜리 지폐였으면 아마도 더 열심히 공부했을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이유가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축복때문이라면, 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에 목을 매달고 있는 노예입니다. 이런 걸 기복신앙이라고 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뭔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황당에 빌고 부뚜막에 빌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까닭은 – 순종하지 않으면 나를 해코지할까봐 하는 그런 두려움 때문도 아니요, 내가 이렇게 열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면 뭔가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거지근성, 노예의식 때문도 아닙니다.

이제 다음 달이면 첫 생일 잔치를 하는 지아를 생각해보세요. 매 주일마다 확인하는 것이지만, 지아는 단 한 순간도 엄마 아빠를 즐겁게 해주려고 아양떨지도 않고요, 내가 엄마 아빠를 즐겁게 해드리지 않으면 나를 해코지 할 거라고 하는 두려움에 떨지도 않습니다.

지아가 아무 짓도(?) 하지 않는데, 아니 하는 짓마다 사실은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하는 짓들인데 – 그런데 그런 지아를 바라보는 엄마 아빠의 얼굴은 늘 미소가 가득합니다. 지아는 그저 지아이면 됩니다. 그런데 참 신비한 것은 – 엄마 아빠의 그 미소, 나를 향해서 변함없이 보여주는 엄마 아빠의 그 그윽한 사랑 안에서, 지아는 엄마를 알아가고 아빠를 알아갑니다. 엄마 아빠와 나누는 그 친밀함 속에서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그 친밀함 속에서 아이는 엄마 한테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그 친밀함 속에서 자신만만하게 자기 속에 심어진 생명을 피워내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 생활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위 축복이라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과 이런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내 속에 있는 생명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해서 그윽한 미소를 짓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이 두려워서 억지로 순종하는 것도 아니고, 그 하나님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노예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향해서 미소를 그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 안에서 “내가 내가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심겨진 “나 됨”으로 인해서 당당해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까?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내 아버지니까 믿는 것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구의 말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친밀한 것입니다. 세상에 아버지와 아들 이상으로 친밀한 관계가 또 어디 있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의 말에 순종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 그런 친밀함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향해서 환한 미소를 지으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시는, 그런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