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녀와 수용소’ 포스터. ‘we must act on what we believe(한글판/사람은 말이디, 생각한대로 행동할 필요가 있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사진 설명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수감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독립영화 ‘숙녀와 수용소(키네마인/제작자 손영선, 감독 이다)’가 교계와 사회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프랑스 소설가 로맹가리의 작품 ‘하늘의 뿌리’를 각색한 이 영화는, 가상의 ‘숙녀’를 통해 수감자들의 인간성 회복과 자유를 향한 열망을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감자들은 고된 중노동에 시달리며 되는대로 행동하고, 불의에 굴복하며 무기력한 삶을 살아간다. 강냉이죽 한 그릇에 짐승처럼 다툼을 벌이고 땅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 하나를 주워 피우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긍지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수용소 막사는 돼지우리처럼 역겹고 분노와 탄식으로 얼룩져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독방에서 나온 1번 수감자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상의 ‘숙녀’ 한 명을 데려왔다며 수용소의 규칙을 바꾸어 놓는다. 첫째 ‘숙녀 앞에서 징징대거나 되는대로 행동하지 말 것!’, 둘째 ‘남자답게 신사답게 청결하게 예의바르게 행동할 것!’, 셋째 ‘방귀 뀌지 말 것!’. 새로운 규칙에 따라 수감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신념들을 되살려 내려는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강냉이죽 한 그릇에도 인간다움을 지키고, 땅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에 결코 무릎꿇지 않으며, 함부로 방귀를 뀌거나 징징거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변화를 주목한 수용소 관리 장교는 막사에 숙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숙녀를 내쫓지 않으면 창녀로 팔아버리겠다”고 협박한다. 하지만 수감자들의 내면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 숭고한 저력을 품게 된다.

1번 수감자는 숙녀를 내놓지 않기 위해 기꺼이 독방행을 자처하고, 남은 수감자들은 뒤집어진 세상을 바로세워야 한다는 믿음으로 핵실험 때문에 땅 바닥에 떨어져 뒤집힌 풍뎅이들을 바로 놓아주기 시작한다. 독방에서 나온 1번 수감자는 이번에는 코끼리떼를 수용소 막사로 불러들인다. 철조망도, 콘크리트 망루도, 세상 그 무엇도 모두 짓밟아버리고 달려가는 코끼리떼와 함께, 수감자들은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수감자들은 처절한 현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과 손에 잡히지 않는 자유를 꿈꾸며 허구와 신화에 기대에 살아간다. 신화와 우상숭배를 통해 체제를 지탱시키는 북한 사회 속에서 그들은 또 다른 의미의 허구와 신화에 기대에 살아간다. 이 영화는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허구의 싸움이 가장 치열하게 대결을 벌이는 정치범수용소를 배경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과 신념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압도하고 지배할 수 있으며 변화와 극복을 가져오는 실존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제작자 손영선 대표.
제작자인 손영선 대표(키네마인)를 만나 영화의 기획의도와 특징을 물었다. 손 대표는 “기독교 정신을 담아 만든 영화지만, 기독교를 넘어 사회에도 큰 희망의 메시지가 될 것”이라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에 근거해 영화를 기획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북한 인권영화는 많지 않다. 원작 ‘하늘의 뿌리’는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이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이 희망을 북한 수용소의 수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다음은 손영선 대표와의 일문일답.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 인권영화에서 북한의 처참한 실상을 보고자 한다. 하지만 북한의 실상이 알고 싶다면 영화보다는 다큐를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쉰들러 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와 같은 맥락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때론 희극을 통해 더 비참한 비극을 그려낼 수도 있다. 숙녀, 코끼리, 풍뎅이 등 영화의 상징에 대해 생각하면 더 깊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기독교관에 따라 숙녀를 주님으로 해석하는 관객도 있는데 가지각색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인 것 같다. 영화 마지막에 탈출을 못한 수감자가 코끼리를 상상해 벽에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수감자는 코끼리 다리를 새 다리로 그린다. 희극적 요소로 넣은 것인데 관객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제작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상의 숙녀’가 성령님으로 다가왔다. 우리 마음에 성령님이 동행하시면 두려울 것도 없고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영화를 제작하며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는가.

“수감자들이 두만강을 건너는 신을 찍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겨울이었는데 하루 만에 강의 반이 얼었다. 하나님이 영상 잘 나오라고 그렇게 하신 것 같은데, NG도 많이 나고 배우들과 스텝들은 동상에도 걸렸다. 너무 힘든 과정에서 감독님과 스텝들 모두 기도하고 영화를 찍었다. 모여서 예배도 드렸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런지 영상도 멋있게 나왔다. 함께 신앙에 의지해 찍어서 그런지 기억에 생생하다.”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듣고 싶다.

“북한 인권영화인데 세계가 주목했으면 좋겠다. 북한 인권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것 같다. 전 세계에 북한이라는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북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다. 또 하나는 교회들이 크리스천 문화에 대한 투자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 교회들이 문화작품을 만드는 일에 그냥 봉사로 함께한다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영화 ‘부러진 화살’은 사법부의 잘못을 지적하며 큰 사회적 이슈를 만들었는데, 기독교 영화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변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