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가난과 온갖 역경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주인공. 1970년 도미해 애틀랜타 한인 이민사와 삶을 궤적을 함께 해 온 김수현 집사(아틀란타한인교회)의 자서전 ‘삶의 언덕에서’의 영문판 ‘Triumph at Last: A Korean-American Life’가 발간됐다.

이번 영문판은 이민 1세뿐 아니라 이민 2세들에게도 보여줘야 한다는 아틀란타한인교회 담임 김정호 목사의 권유로 한국어판 출판 5년 만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김수현 집사는 “담임 목사님이 8천장이나 되는 원고를 다 읽어보고 ‘보통 자서전에 아름다운 것만 나열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 선생님 책을 보고 많이 울었다’며 이 책을 2세들과 함께 나누자고 격려해 주셨다”고 말했다.

어릴 적, 해방과 함께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김 집사는 극심한 가난으로 조부모와 여동생을 잃었고 ‘요셉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믿음 하나만을 갖고 공부를 위해 도심지로 나왔다. 수 많은 우여곡절 끝에 포항 동지중학교와 대구 상업고등학교, 영남대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김 집사는 월남 파병 기술자로 미군에서 일하던 인연으로 애틀랜타에 발을 디디게 됐다.

이후 김 집사는 월레스파워 코퍼레이션과 사우디 인터맥 코퍼레이션 등 미국 회사에서 일하다가 1984년부터 작년까지 자영업을 운영해 왔다.

그 험난한 과정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김 집사는 희망을 잃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높은 것만 바라보지 말고 낮은 곳부터 생각하라. 처음부터 좋은 직장을 간다면 한번 밑 보이면 끝이다. 하지만 낮은 곳부터 시작해 신임을 얻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하고 “구하면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왔다. 항상 어딘 선가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일어설 수 있었던 삶을 젊은이들과 나누고 싶다”고 간증했다.

그가 전한 삶의 흔적 곳곳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가능할 수 없었던 기적 같은 일들이 많았다. 김 집사는 그런 간증이 있을 때 마다 ‘재치가 있죠’라는 구수한 언어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들을 증거해 냈다.

본래 424페이지였던 한국어판 자서전은 2세들이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176페이지 분량으로 축소됐으며 전 미주문인협회장 최연홍 씨가 영역했다. 책을 구입하기 원하는 한인은 678-789-1553 으로 연락하면 된다.

다음은 간추려 본 김수현 집사의 자서전이다.

일본에 살았는데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말도 모르고 일본말만 할 때인데 동사무소에서 성경으로 한글을 가르쳐 주신 분이 있었다. 그 때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고향인 의성으로 돌아오니 먹을 것이 없었다. 쌍둥이 동생 중 한 명이 내 손에서 죽었고 곧이어 조부모도 돌아가셨다. 내 손으로 여동생을 뒷산에 묻었다. 아버지는 머리에 먹물이 들어가면 게을러진다고 하셨지만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고 3일을 걸어 포항으로 갔다. 이 넓은 세상에 거처할 곳도 없구나 라는 생각에 돌아갈까 말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요셉을 지키신 하나님이 계실 거라 믿었다.

4~5일씩 굶은 날도 많고 구두닦이와 신문배달 등 안 해 본 것이 없다. 포항 대신동 동사무소에서 급사로 일하기도 했는데 피난을 왔다고 말해 4살 어리게 호적을 등록했다. 당시 17살로 나이가 많아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포항을 오는 길에 만났던 할아버지 한 분이 그런 지혜를 주었었다.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었는데 우연찮게 알게 된 친구의 소개를 받아 김진화 선생님을 찾아갔고 선생님의 도움으로 중학교 2학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김수현 집사는 영문판 글머리 이 책을 김진화 선생님께 바친다고 적었다)

일본에서 다니던 초등학교를 중퇴한 내게 중학교 2학년 수준의 영어나 수학은 너무나 어려웠다. 교회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교회 장로나 권사님들은 거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내 인사를 잘 받아 주지 않았다. 한번은 13명이 세례 교육을 받았는데 나만 홀로 떨어졌다. 눈물이 많이 났고 ‘돈 없으면 사람 대접도 못 받는구나’ 생각됐다.

돈이 없어 퇴학위기에 처했었다. 정진수 장로님이 도와주셔서 주유소에서 일하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정 장로님 책에 자주 들리시던 담임 목사님이 세례를 못 받게 된 내 사정을 아시게 됐고 세례를 주셨다.

포항에서는 도저히 성공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동사무소에 근무할 때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움을 주겠다고 하셨던 분이 기억나 찾아갔다. 대구 상업고등학교를 소개시켜 주셨고 2학년으로 전학하게 됐다. 알고 보니 그 분은 포항여고 선생님으로 고아출신으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신 것 같다. 3학년에는 돈이 없어 교감 선생님께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장학금이 있다고 알려주셔서 1년 동안 배구를 하게 됐다. 졸업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본적을 회복하고 군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를 마치고 국방부 본부로 발령났다. 소위 백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간 것이다. 국방부 본부로 발령 난 34명 중 31명은 장관 아들들이었다.

이후 성균관 대학교에 다니다가 영남대학교 토목과로 전학했다. 돈이 떨어져 교수님에게 도와 달라하니 일거리를 주었다. 상주도시계획공사였는데 대학교 3학년 때 도시 계획을 내 손으로 하게 된 것이다.

4학년에 돼서는 너무 힘들어 자살을 기도했다. 그 때 꿈에 예수님을 봤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예수님 나 도와주세요’라고 외치니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수현아 걱정하지 마라’라며 사라지셨다. 깨어나는 병원이었다. 경찰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자살을 기도했느냐고 찾아왔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무료로 퇴원시켜 주었다. 대구로 돌아왔는데 손이 아프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손이 썩어 잘라야 한다고 했다. ‘손이 있어도 먹고 살기 힘든데 손이 없으면 못 먹고 산다’고 수술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됐다.

대구 도청 건설과에서 일하다가 대구에서 미8군 토목기사로 취직하게 됐다. 이후 월남 파병 기술자로 취직하게 됐다. 34명을 뽑는 시험에 1천여명이 지원했는데 합격을 했다. 월남에서 고속도로와 비행장, 항구 등을 설계했는데 친하게 지내던 미국엔지니어가 미국에 올 수 있다며 설명을 해줬다.

1970년 애틀랜타에 도착했는데 갈 곳이 없었다. 공항에서 한 사람을 만나 전화를 연결해 주었는데 한국 사람이었다. 내일부터 부산으로 휴가를 가니 집을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2주 동안 그곳에 머물며 미국 설계사무소에 취직할 수 있었다. 이후 여러 회사를 다녔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싱가폴도 다녀왔다.

더 자세한 내용은 자서전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