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인회 회장과 임원진 그리고 특기 사항

2대 변종수
회장 선출 시기 및 방법 : -1969년 개천절 일주일 전에 에모리 대학 학생회관에서 정기 총회를 개최하였고, 회장에 변종수, 부회장에 송준희, 서기 겸 재무에 문희석을 선출하였다.
-1970년 8월 말 변종수 회장이 테네시 주 멤피스로 이주하였고, 이 때 회장잔여 임기 동안 송준희 부회장이 회장 서리 역할을 하였다.

임원진 : 회장 변종수, 부회장 송준희, 서기 겸 재무 문희석(당시 에모리 대학 신학 박사 과정에 수학하고 있는 목사).
특기 사항 : - 1969년 추수감사절에 문희석 목사 댁에서 조지아 텍과 에모리 대학 유학생을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다.
-1969년 12월 변종수 회장이 주관하여 에모리 대학 학생회관에서 망년회를 개최하였다.
-1970년 삼일절 기념 행사를 디케이터 YMCA에서 하였고, 기념 행사 후 변종수 회장 댁에서 식사를 하였다.
-1970년 5월 애덴스(Athens)의 조지아 대학에서 열린 한국의 밤(Korean Night)행사에 김수일(김일수)태권도 사범과 도장 제자들이 참석하였다.
-1970년 광복절 기념 행사로 야유회 및 친선 축구 대회(조지아 대학 유학생팀 대 애틀랜타 팀)를 로렌스빌 고등학교에서 개최하였다.
(2대 한인회장에 대한 기록도 주로 변종수 교수의 증언에 의하여 작성하였음.)

3대 문희석(문사이러스)
회장 임기 : 1970년 말부터 1971년 여름까지.
임원진 : 임원진에 대한 자료를 구할 수 없음.
특기 사항: -이 무렵 조지아 주는 한국 간호사 자격증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다른 주에서 많은 간호원들이 애틀랜타로 들어오고 있었다. 문희석 회장(문사이러스 목사)은 이러한 사람들을 본인 집에서 묵게 해주고 병원에 데리고 가서 일자리를 찾아주었다. (이국자씨 증언).

-당시 애틀랜타 관할 총영사관이 휴스턴에 있었는데, 여기서 문희석 회장(문사이러스 목사)은 I-20 Form을 가지고 와서 한국으로부터 30여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문 회장이 금전적으로 수수료를 챙겼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고, 이러한 것은 모함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여튼 문 회장의 본직이 목사였기 때문에 이를 문제삼는 한인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 문희석씨가 한인회장을 그만두었다(편찬위원회 한인 초청 간담회 증언 자료에 의거 작성하였음).
-문희석(문사이러스)씨가 1971년 여름에 한인회장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남으로써 한인회장직의 공백기가 있었다(방창모 박사 등의 증언).

4대 송준희
회장 임기 : 1971년 말부터 1972년 말까지.
특기 사항 : 1972년경은 다수의 한인 이민들이 애틀랜타로 유입하기 시작할 시기이다. 1972년부터 연간 수백 명의 한인들이 애틀랜타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당시 송준희 한인회장은 이러한 유입 인구가 애틀랜타에 정착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만, 당시 한인회 활동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여기에 기록하지 않았다.

5대 황용연
회장 임기 : 1972년 말부터 1973년 말까지.
임원진 : 부회장 이한봉, 조명규, 강석영.
특기 사항 : 1973년경에도 다수의 한인 이민들이 애틀랜타로 유입하였다. 이 시기에도 한인회는 이러한 유입 인구가 애틀랜타에 정착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만, 당시의 한인회 활동이 문자화된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 자세히 기술할 수 없을 뿐이다.

6대 이봉호
회장 임기 : 1973년 말부터 1974년 12월까지.
임원진 : 회장 이봉호, 이사장 최기환, 사무총장 이영복.
특기 사항:- 당시에 살고 있던 일부 한인들은 이봉호 한인회장이 중도에 문제가 있어서 한인회장을 그만두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봉호 회장은 1974년 연말 정기 총회(망년회)에서 사회를 보았기 때문에 그가 한인 회장을 중도에 그만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봉호 회장은 1974년 9월 30일 한인회를 조지아 주에 비영리 단체(None Profit Organization)로 등록하였고, 방대한 한인회 회칙을 마련하였다. 이봉호 회장은 당시 에모리 대학 법대 교수로서 이 한인회 회칙을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회칙에 대한 동의 절차를 철저하게 밟지 못하였다는 평이 있었다. 이 회칙에 의거하여 이봉호 회장은 최기한 교수(당시 조지아 스테이트 대학 수학과 통계학 교수)를 이사장에 임명하였다.

-1974년 연말 정기 총회에서 차기 한인 회장이 정식으로 선출되지 못하자, 최기환 한인회 이사장은 에모리 대학 교수 방창모 박사를 한인회 수습대책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한인회 회칙을 만들기 위한 수습대책위원회는 방창모 위원장과 강석영, 권오승, 문대호, 송준희, 이광명, 이명선, 이상호, 지홍구 위원으로 구성하였다.

-방창모 박사는 지홍구씨(현재 이름은 지형석 목사), 이상호씨(14대 한인회장)와 더불어 한인회 회칙을 제정하여 한인회 수습대책위원회에 회부하였고, 여기서 한인회 회칙안을 통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