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해안 평야, 갈릴리, 이스르엘 평야, 요단 계곡, 사해, 유대 광야 네게브, 유대 산지의 배경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의 역사와 배경을 공부하는 이유가 있다. 예루살렘은 성경의 가장 중심을 이룬 곳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이후 가나안의 여러 지역에 정착하였지만 예루살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갈릴리에서 사역하셨지만, 구원은 예루살렘에서 완성되었다. 예루살렘의 중요한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역사와 그 배경을 알면,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아주 또렷해 진다.

예루살렘의 배경은 이렇게 접근하면 좋다. 예루살렘 옛 성을 먼저 들어가거나 다윗 성을 방문하기 보다는 예루살렘의 지형을 잘 살필 수 있는 전망대를 먼저 찾는 것이 좋다. 아르몬 하나찌브 (Armon haNatziv)의 전망대 (사진)는 예루살렘 성의 남쪽에 있는데 이곳에서 예루살렘을 잘 조망할 수 있다. 기드론 골짜기, 중앙 골짜기,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잘 확인할 수 있다.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 있는 전망대도 예루살렘의 지형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전망대에서 예루살렘의 주변 지형을 살핀 후, 예루살렘의 역사와 성경적 배경은 다윗 성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다윗 성의 히브리식 이름은 이르 다비드 (Ir David)이다. 예루살렘 옛 성 (Old City)을 먼저 보면, 성경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

다윗 이전 예루살렘 (the Bronze Age)

성경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주 배경은 다윗 성을 말한다. 다윗 성은 오토만 술탄 슐레이만에 의해 축성된 예루살렘 성벽 안이 아닌 지금의 성벽 바깥, 남쪽의 언덕을 말한다. 성전 산의 남쪽이다.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한 때는 주전 5천년 전인 금석 병용기 시대부터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성벽이 축성된 때는 중기 가나안 시대인 지금부터 약 4천년 전이다. 중기 가나안 시대에 예루살렘은 약 45두남 (11.25에이커)의 작은 도시였다. 가나안 시대의 예루살렘은 작았지만 견고하게 축성되었고, 인상적인 물 공급 시설을 갖춘 도시였다. 예루살렘은 성경에 살렘 (Salem)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온다.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었다. 멜기세덱은 네 왕들을 무찌르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왕곡에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축복하였다 (창 14:17-20). 비슷한 시기에 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 가나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주전 19-18세기 예루살렘은 가나안의 다른 도시 국가들과 함께 이집트의 패권에 저항했던 도시로 나온다. 이집트 저주 문서에 기록된 예루살렘 이름은 루샬리뭄 (Rushalimum)이었다. 주전 14세기 아마르나 시대에 예루살렘은 우루살림 (Urusalim)으로 기록되었다. 아마르나 시대는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간의 정치적 세력 다툼과 하비루의 침입으로 불안한 시대였다. 이스라엘은 아직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이스라엘 정착 시대 (Iron Age I)

가나안 정착 초기에 예루살렘에는 아모리 족속이 거주하였다. 당시 예루살렘 왕은 아도니세덱이었다. 아도니세덱을 포함한 아모리의 다섯 왕들은 연합하여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맺은 기브온의 히위 족속을 공격하였다 (수 10:1-5). 여호수아는 기브온을 돕기 위한 전쟁에 출전하여 아도니세덱과 아모리 왕들을 무찔르고 중앙 산지의 남쪽과 서쪽 쉐펠라, 그리고 네게브까지 점령하였다 (수 10:40-41). 그러나 예루살렘은 점령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그곳에 정착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가나안의 도성으로 남았다. 예루살렘은 다윗 이후 이스라엘의 도성이 되었다.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다윗은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삼하 5:3). 이때 그의 나이는 삼십 세였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을 7년 6개월간 통치한 후에 여부스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에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33년을 통치하였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온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점을 갖고 있다. 예루살렘에는 수량이 풍부한 기혼 샘이 있다. 물은 도시를 형성하는데 절대 필요하다. 예루살렘에는 세 개의 골짜기 (기드론 골짜기, 힌놈의 아들 골짜기, 중앙 골짜기)가 있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을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중앙 산지의 중심에 위치하므로, 산지에 거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북쪽 사마리아 또는 남쪽 헤브론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은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위치였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이루어진 국가로써 각 지파로 쉽게 분열될 가능성이 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은 12지파들이 한 국가로 연합된 상징적인 장소였다. 더우기 다윗은 매우 영적인 사람이었다. 목동, 군인, 행정가, 정치인, 시인, 여기에 다윗은 하나님을 절대 신앙했던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시내산이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계약이 체결된 곳이라면, 다윗은 예루살렘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심지로 삼기를 원했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시 76:2). 다윗의 이런 염원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은 이후 즉시 준비해 갔다. 다윗은 바알레유다 (기럇 여아림)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겼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의해 자신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했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였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다윗의 비전대로 여호와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위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모리아 산이다 (대하 3:1).

유다 왕국

솔로몬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통일 왕국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되었다. 이후 예루살렘은 축소된 남 유다의 수도로 약 400년간 존재하였다. 나라가 분열되므로 이스라엘은 크게 약화되었고 주변 국가들 특히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의 잦은 공격으로 나라는 위기에 처하였고 결국 멸망하였다. 나라가 분열되고 5년 후 (르호보암 통치 5년) 이집트 시삭 (Shishak)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포함한 많은 성읍들을 함락하고 약탈하였다. 주전 722년,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을 함락했고 사마리아를 파괴하였다. 사마리아의 멸망 직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 유다로 피신했고 다윗 성 서쪽 언덕에 많이 거주하였다.

얼마 후, 남 유다의 많은 성읍들도 앗수르 산헤립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예루살렘도 멸망 위기에 처하였다 (왕하 18:19). 그러나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공격에 대비하여 서쪽 언덕에 넓은 성벽 (사진)을 건축하였고 수로 (Hezekiah Tunnel)를 건설하였다. 히스기야 수로는 기혼 샘의 물을 533미터의 수로를 통해 다윗 성의 남쪽 연못에 저수하였다. 결국 예루살렘은 산헤립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였다. 그러나 주전 586년 유대 월력으로 아브 월 (Av)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었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도시는 불에 살라졌다 (왕하 25:8-9).

포로 귀환과 2차 성전

주전 6세기 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유다인들의 귀환과 성전 건축을 허락하였다. 그래서 시온으로 귀환한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 다시 거주하였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스룹바벨과 포로 귀환자들은 많은 반대 중에도 주전 516년 2차 성전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였다 (스 6:13-15).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은 느헤미야에 의해 52일 만에 주전 444년에 재건되었다. 헬라 시대에 그리스 문화와 정치 제도가 예루살렘에 소개되었고, 유다인들은 종교적 갈등을 많이 겪었다. 유대 종교가 가장 혼란했던 때는 하스모니안 시대였다.

그리스의 셀류키드 (Seleucid)를 무찌르고 마카비 왕조를 세운 하스모니안은 예루살렘을 다시 수도로 삼았다. 예루살렘은 다시 종교의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흩어진 많은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다. 2차 성전 시대, 특히 헤롯 시대에 예루살렘은 서쪽 언덕까지 넓게 확장되었다. 서쪽 언덕은 귀족들의 생활 거주지였다. 헤롯 궁, 산헤드린 공회, 제사장, 왕족이 주로 거주하였으며 반대로 다윗 성은 가나안 자, 저급한 상점과 가죽, 염색공의 산업 구역이 되었다. 다윗 성에서 귀족 구역은 헬렌 여왕 (Queen Helen Adiabene)과 베타노스 (Vettanos)의 아들 데오도투스 (Theolotos)의 회당 뿐이었다. 다윗 성의 남서쪽에 위치한 실로암 연못은 2차 성전 시대의 마지막 200년간 중요한 장소로 남았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멸망했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로마에 함락된 이후 20세기까지

주후 132-135년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로마 황제 하드리안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도시로 만들었다. 예루살렘이란 이름은 사라졌고 도시 이름은 알리아 카피톨리나 (Aelia Capitolina)로 바뀌었다. 이교도 도시를 세우기 위한 많은 건축 재료들은 다윗 성의 무너진 성벽 잔해에서 가져왔다. 이로써 다윗 성은 더욱 철저히 훼손되었다. 다윗 성의 과거 영광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비잔틴 시대에 다윗 성 북쪽 언덕에 작은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곳 유대인 공동체에서 실로암 교회로 내려가는 길이 만들어졌다. 실로암 교회는 히스기야 수로가 끝나는 지점에 유도키아 여왕 (443-460년)에 의해 건축되었다. 초기 무슬림 시대에 일부 주민들이 다윗 성에 거주하였다. 십자군 시대인 11세기에 예루살렘의 남쪽 성벽은 북쪽으로 이전되었고 다윗 성은 성 밖에 놓이게 되었다. 다윗 성은 거주지에서 벗어났고 곧 성 밖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성 안으로 이주했고, 다윗 성은 농경지로 바뀌게 되었다. 과거 다윗 성의 영광은 땅 속에 다시 묻히게 되었다.

오토만 터키 시대 말에 유대인들이 다윗 성에 조금씩 거주하기 시작했다. 1873년 메유하스 가족 (Meyuhas Family)이 다윗 성의 남쪽 끝에 정착하였다. 1882년 예멘 유대인들이 다윗 성 인근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유대 공동체의 도움으로 여러 유대인 가족이 다윗 성에 정착하였고 마을 이름을 실로아 마을 (Kfar haShiloah)이라 불렀다. 20세기 초 베이런 에드먼드 로스차일드 (Baron Edmond de Rothschild)는 고고학 발굴과 유대인 정착을 위하여 다윗 성의 많은 땅을 구입하였다. 영국 정부에 저항한 아랍 폭동 (1936-1939)으로 말미암아 실로아 마을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강제로 다윗 성을 떠나야 했고 그들의 본토에서 또 추방되었다.

다윗 성 발견

다윗 성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도성임에도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많은 사람들은 다윗 성을 주후 16세기 오토만 터키에 의해 축성된 현대 예루살렘 성벽 안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윗 성이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이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은 19세기이다. 천 년이 넘도록 예루살렘은 잘못 알려졌고 또 기억도 하지 못했다. 영국의 팔레스틴 탐사 기금 (British Palestine Exploration Fund)의 두 번째 탐사 대장인 찰스 워렌 (Charles Warren)은 1867년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오토만 정부에게 성전 산 발굴 허락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오토만 정부는 찰스 워렌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워렌은 성 밖, 성전 산 주위를 알아보기 위해 여러 곳을 깊이 파 보았다. 이 과정에서 워렌은 성전 산 남쪽, 오펠 지역에서 고대 성벽 (오펠 성벽)을 발견하였다. 이 성벽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워렌은 고대의 예루살렘 성은 지금의 성벽 안이 아니라 성벽 바깥, 남쪽 언덕일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다윗 성이 성 밖일 것이란 확신을 가진 워렌은 지금의 다윗 성을 발굴하고, 이곳에서 고대 물 공급 시설 (water supply system)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워렌의 이름을 따라 워렌의 수갱이라 부른다 (the Warren’s Shaft). 워렌의 확신은 물 공급 시설의 발견으로 확증되었다 (사진).

워렌의 수갱이 발견되므로 고대 예루살렘 성은 지금의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인 것이 확증된 것이다. 곧 이어 히스기야 수로 (Hezekiah’s Tunnel)를 지나던 한 소년에 의해 고대 히브리어 석비 (Siloam Inscription)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앗수르 왕의 공격에 대비하여 히스기야가 기혼 샘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위대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사 22:11). 20세기 초인 1909-1911년 파커 탐험대 (the Parker Expedition)는 예루살렘의 가장 오래된 성벽을 다윗 성에서 발굴하였다. 이제는 누구도 예루살렘의 고대 도시는 성 안이 아닌 성의 남쪽 지금의 다윗 성이란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많은 증거들이 속속 발견된 것이다. 이후로 영국, 독일, 프랑스는 고고학 탐사대를 구성하여 다윗 성으로 파견하였고 광범위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발굴은 레이몬드 베일의 발굴, 캐트린 캐년의 발굴, 그리고 이갈 실로의 발굴을 꼽는다. 1913-1914년 유대계 프랑스 고고학자인 레이몬드 베일 (Edmond Weill)은 베이런 에드몬드 로스차일드 (Baron Edmond de Rothschild)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오토만 터키 말기에 다윗 성을 넓게 발굴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에 요르단의 통치 시기에 영국의 고고학자인 캐트린 캐년 (Dame Kathleen Kenyon)이 다윗 성을 발굴하였다. 6일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영토 속에 포함된 이후 1978-1985년 이갈 실로 (Yigal Shiloh)가 다윗 성 발굴을 총 지휘하였다. 이갈 실로 이후 다윗 성에 대한 새로운 발굴은 1995년에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다윗 성 발굴은 하이파 대학의 로니 리흐 (Ronny Reich), 이스라엘 고고학 협회의 엘리 슈크론 (Eli Shukron), 히브리 대학의 에일랏 마자르 (Eilat Mazar), 히브리 대학의 도론 벤아미 (Doron Ben-Ami)가 발굴을 책임지고 있다.

다윗 성은 창세기 12장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부터 사도행전의 완성된 구원이 세계로 확산되는 중심이 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렸다. 다윗과 솔로몬, 유다 왕국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통치하였고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이곳에서 선포되었다. 갈릴리에서 메시아로 활동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 (다윗 성)을 자주 방문하셨고 많은 이적을 이곳에서 행하셨다. 가장 큰 표적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

다윗 성에서 발견된 수 많은 고고학적 증거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선명하게 해 준다. 예레미야를 지지하며 함께 고난을 받았던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의 인장이 발견된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다. 예수님께서 눈먼 소경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어 낫게 하신 사건의 배경인 2004년에 발견된 실로암 연못, 실로암 연못에서 성전을 향하는 포장된 도로의 발견, 구약과 신약의 시대를 넘어 발견되는 수 많은 증거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사모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더해 줄 것을 믿는다. 나에게는 이런 기쁨이 충만하다.

다윗 성에 들어가면 먼저 전망대를 찾는다. 그곳에서 감람산, 기드론 골짜기, 다윗 성을 잘 조망한다. 에일랏 마자르가 발굴한 거대한 석조 건물 (Large Stone Structure), 왕실 구역 (G area), 워렌의 수갱 (Warren’s Shaft), 중기 가나안 시대의 물 공급 시설 (Water Supply System), 히스기야의 수로, 2차 성전 시대의 실로암 연못, 2차 성전 시대의 포장된 도로를 돌아본 후에 다시 레이몬드 베일이 발굴한 다윗 왕실의 무덤 지역을 찾는다. 모두 다윗 성 안에 있다. 그곳에서 여호수아 15:8절의 경계선을 잘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1차 성전 시대의 성벽과 기드론 골짜기, 중앙 골짜기, 힌놈의 아들 골짜기를 한 곳에서 잘 바라볼 수 있다. 다윗 성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글자가 살아나 당신의 마음을 심하게 두드릴 것이다. 글자가 소리를 내어 당신의 귀에 음성으로 들릴 것이다. 그리고 글자가 현실이 되어 실재 모습을 보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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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