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권력과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중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 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왕하 20:20)

▲사진 1

팔레스틴에서 이스라엘 시대 이전, 고대에 도시가 형성될 기본적인 조건은 네 가지였다. 물, 전략적인 장소, 경작지 그리고 중요한 도로이다. 이 모든 조건을 다 충족하기는 쉽지 않지만, 물은 도시의 형성 조건에 가장 중요하다. 샘이 있는 곳에는 거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만약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샘이 없다면, 어떤 수고를 할지라도 물 문제를 해결한 후에 도시나 마을이 형성되었다. 물은 도시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역사는 기혼 샘 (사진 1)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혼 샘의 물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예루살렘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래서 가나안 시대부터 예루살렘 주민들은 기혼 샘의 물을 수로, 거대한 저수조, 댐을 이용하여 물을 다스렸다. 기혼 샘은 기드론 골짜기의 남쪽에 위치하지만, 기혼 샘의 물을 저수하는 연못 (pool)은 언제나 샘물과 빗물을 함께 저수할 수 있는 중앙 골짜기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2차 성전 시대의 실로암 연못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사 12:3)

2004년 6월, 다윗 성의 남쪽 배수로를 공사하던 중 큰 저수조의 일부가 중앙 골짜기의 남쪽에서 발견되었다. 공사는 즉시 중단되었고, 이스라엘 고고학 협회는 발굴을 위하여 엘리 슈크론 (Eli Shukon)과 로니 리흐 (Roni Reich)를 파견하였다. 두 고고학자들의 수고로 말미암아 드러난 연못은 2차 성전 시대의 실로암 연못인 것이 밝혀졌다. 이 연못이 발견되기 전에는 비잔틴 시대의 실로암 연못을 예수님 당시의 실로암 연못으로 막연하게 인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연못은 요한복음 9장에 ‘나면서 소경된 자를 예수님께서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어 치유하신 사건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곳이다. 새로 발견된 실로암 연못은 사면이 계단식으로 만들어져 모든 방향에서 물을 길을 수 있게 건설되었다. 실로암 연못의 사면 계단은 하스모니안 시대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비가 많이 내린 때에는 마지막 계단까지 물이 넘쳐 흘렀다. 이번에 발굴된 연못 일부와 아직 발굴되지 않은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숲을 계산하면, 1세기 당시 실로암 연못의 크기는 약 3두남 (50 X 60 m) 정도 될 것이다.

2차 성전 시대의 실로암 연못은 성전 예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곳에서 길어 올린 생수는 무덤 지역을 지나온 성전 순례자들을 위한 정결 의식에 절대 필요하였다. 실로암 연못과 관련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숙곳 (초막절)에 제사장들이 실로암 연못으로 내려가 물을 길어 성전 제단에 붓는 ‘심핫 베잇 하쇼에바 의식’이다. 실로암 연못의 물을 성전 제단에 붓는 의식을 행하는 이유는, 이른 비가 내리는 초막절 (숙곳) 즈음에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실 것을 기원하는 것이다.


실로암 연못의 모양은 마치 2차 성전 시대의 정결탕과 흡사하다. 연못을 발굴한 로니 리흐 (Roni Reich)와 엘리 슈크론 (Eli Shukron)은, 1세기 당시 실로암 연못은 많은 순례자들을 위한 공공의 정결탕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유대인들은 일년에 세 차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성전에 올라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세 절기 때가 되면, 예루살렘은 수 많은 순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실로암 연못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였고,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정결 의식을 행한 후에 중앙 골짜기의 포장된 도로를 따라 성전으로 올라갔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신 것은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매우 자연스럽다. 소경이 실로암 연못으로 가 눈을 씻을 때에는 이미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정한 것을 씻는 정결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사진 2

사면 계단 곳곳에 홈이 파져 있는 것은 나무로 프라이버시 공간을 위해 기둥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정성껏 정결 의식을 행하기 위한 개인의 공간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기혼 샘의 본래의 목적인 예루살렘 주민들과 순례자들을 위한 식수 (drinking water)는 실로암 연못의 동쪽 맞닿은 곳에 급경사를 이룬 바위 밑으로 실로암 연못보다는 작지만, 제법 큰 규모의 직사각형 작은 연못에 저수한 물을 식수로 이용했다 (사진 2).

북쪽 광장 (the Northern Promenade or Plaza)

실로암 연못에서 북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그곳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다. 지금은 광장의 일부 흔적만 확인할 뿐이다. 이곳에 일련의 기둥들이 있었는데, 이 기둥들은 지붕을 받치기 위한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한가롭게 산책하거나 실로암 연못을 바라보며 평안한 시간을 보냈다. 발굴 결과에 근거하여, Yael Kilemnik은 1세기 당시 실로암 연못의 구조와 연못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큰 그림으로 그렸다. 야엘의 그림을 참고하면, 한 아이가 아버지의 어깨를 타고 있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유대인들 가운데 오랫동안 논란이 된 주제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언제부터 성전을 순례할 의무가 있는가’에 대한 주제이다. 벙어리, 저능아 그리고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 앞에 그 모습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누가 어린이인가? 아버지의 어깨에 탈 수 없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샤마이 학파는 말한다. 그러나 힐렐 학파는, 아버지의 손을 잡을 수 없는 (이미 성장한) 사람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Mishnah, Hagigah, 1:1).

서쪽 포장된 길 (순례자의 도로)

▲사진 3

실로암 연못의 광장 북서쪽 끝 (사진)에서 2차 성전 시대의 말기에 속한 포장된 계단 길 (stepped road)이 발견되었다. 큰 돌로 포장된 길은 실로암 연못에서 중앙 골짜기 (Tyropoeon)를 따라 성전, 로빈슨 아치까지 연결되었다. 실로암 연못에서 정결 의식을 마친 순례자들은 이 길을 따라 순례의 마지막인 성전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방문하실 때의 표현들을 보면, . . .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마 21:9-10),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 (마 21:18),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 24:1) 여기에 인용한 말씀들은 모두 성전에서 남쪽 실로암 연못으로 연결된 포장된 길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동쪽 포장된 길 (마지막 은신처)

2차 성전 시대의 말에 해당되는 또 하나의 포장된 길이 서쪽 포장된 길과 나란히 동쪽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두 개의 길은 나란히 만들어졌다. 동 서, 두 개의 길은 남쪽에서 매우 넓게 건설되었다. 이곳에서는 길을 향하여 문이 있는 상점들도 발견되었다. 일부 구간에서는 의도적으로 포장된 돌을 깬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그 밑에서 거대한 배수로가 발견되었다. 그곳에서 항아리, 유대인 항쟁 기간에 주조된 동전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이 배수로는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함락될 때, 유대인들의 마지막 도피처였다. 유대 반란자들은 배수로에 숨었지만, 결국 비밀 은신처는 로마 군사에 발견되었고 이곳에 숨은 자들을 찾기 위해 포장된 돌을 깬 것이다 (사진).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기록에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내용이 있다: 발각된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거나 로마인들에게 포로가 되었다. 점령군들은 굴에서 숨은 자들을 찾기 위해 거처를 마련하였고, 지반을 뿌리 채 흔들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이곳에서 2천의 시신이 쌓인 채 발견되었다. 일부는 스스로 자결하였고, 일부는 다른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은 기근에 의해 망하였다 (the Wars of the Jews, 6, 9, 4)

비잔틴 시대의 실로암 연못


히스기야 수로를 빠져 나오면 그곳에 비잔틴 시대의 연못이 있다. 실로암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실로아흐’의 그리스어 발음에서 유래된 것이다. 비잔틴 시대의 실로암 연못은 5세기 중반 유도키아 (Eudocia) 여왕에 의해 건축된 실로암 교회의 일부분이다.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되고 중앙 골짜기의 남쪽에 위치한 1세기의 실로암 연못은 겨울철 빗물에 의해 계속 토사가 쌓여 묻히게 되었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졌다. 그래서 400년 후인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실로암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던 유도키아 여왕은 히스기야 수로가 끝나는 지점에 큰 교회를 세우고 연못을 교회 안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비잔틴 시대에 이어, 초기 무슬림, 십자군, 후기 무슬림, 오토만 투르크 시대를 거치면서, 이곳 마을 이름을 실반 (Silwan)이라 부르게 된 것은 비잔틴 시대의 실로암 교회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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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