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학술모임’과 ‘신학과 목회 리더자 네트워크’가 주최하고 조지아크리스찬대학(총장 김창환, 이하 GCU)이 후원한 목회자 신앙강좌가 27일 GCU 멀리미디어센터에서 열렸다.

세미나의 강사로는 호남신학대학교 차종순 총장과 대덕교회 담임 이중삼 박사가 나섰으며 각각 ‘언더우드의 삶과 신앙’, ‘다문화 사회에서의 기독인의 자세’를 주제로 강의했다.

지난 화요일(23일)과 오는 토요일(27일) GCU 개강 특강 및 신앙강좌를 인도하고 있기도 한 두 강사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강의로 참석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다음은 이날 강의한 차종순 총장의 강의 요약

언더우드 선교사의 성공이유 다섯 가지는 크게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신앙, 가족의 재정적 지원, 원활한 대인관계, 아내의 협력,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 등이다.

첫 번째로 그의 신앙관에 대해 알아보자. 당시 미국은 종말론적 사상이 강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종말론적 보수 신앙을 갖고 있었다. 복음주의적 신앙이란 예수님 중심적 신앙관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때문에 선교사들은 종말론적 동기, 시간의 긴박성에 대한 동기가 강했다. 여기에 사랑의 동기가 더해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살랐다.

당시 선교사들이 본 한국은 어땠을까. 1900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있었던 선교사 대회의 보고를 들어보면 한국 사람들은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전도를 잘했다. 전도를 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조선 사람들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나누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조선 사람들은 또 헌금을 잘했다. 예수님을 믿고 자기 집과 논, 밭을 모두 바친 사람들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조선 사람들은 기도를 굉장히 많이 했다.

두 번째로 언더우드는 가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믿음이 좋은 가문은 똑똑한 아들 하나를 선교사로 보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때문에 이들은 선교에 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 역시 북장로교 선교회가 재정부족으로 추가 선교사를 파송해 주지 않자 가족을 통해 6명의 선교사를 모집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형은 6명의 선교사가 한국으로 가는데 드는 비용과 1년치의 월급을 지원해 주었다. 당시 미화 1달러는 한국 사람 20명의 하루 일당이었으며 뉴욕에서 포틀랜드까지 철도요금이 60달러, 선교사의 한달 월급이 60달러,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까지의 경비가 338달러였다.

세 번째로 언더우드는 원만한 인품의 사람이었다. 선교현장에서 동역하는 것이 참 힘들다. 당시 선교현장을 허락받은 곳은 광혜원 뿐이었는데 선교사들간의 주도권 싸움이 있기도 했다. 언더우드는 이런 상황에서 보통 중립을 지키며 중재하는 역할을 잘 해냈다. 이후 도착한 마펫 선교사와도 지역분할을 통해 큰 문제없이 지냈다. 신학교 문제로 한차례 마찰이 있기도 했지만 비교적 원활한 대인관계를 유지했다.

넷 째 부인의 협력이다. 언더우드의 부인은 의사로 민비를 비롯해 수 많은 관료들의 부인들을 치료했다. 민비와 언더우드 부인은 절친한 사이로 서로 옷을 바꿔입고 세자가 놀러 와 잠을 자고 가기도 했을 정도이다.

이는 다섯째인 정부와의 긴밀한 관계와 연결돼 선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왕이 절대권력을 가진 조선 사회에서 언더우드의 선교사 성공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