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을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한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영적 사건들을 가르켜서 신학적으로는 구원의 서정, 혹은 구원의 순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순서는 시간적인 순서라기 보다는 논리적인 순서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햇빛을 프리즘에 통과 시키면 일곱 가지 무지개 색을 볼 수 있지만 그 빛을 시간 속에서 이해하지 않듯이, 구원을 논리 속에 통과 시키면 일련의 각각 다른 구원의 측면들을 볼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 하나 개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전체로서 하나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구원의 순서에 첫 번째로 오는 것이 소명이다.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수단으로 하여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께서 직접 초자연적으로 사람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먼저 예수를 믿고 이미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부르신다. 먼저 예수를 믿는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전도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도를 통하여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데, 이것을 소명, 곧,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이 소명은 성격상 두 측면을 갖고 있다. 이 두 측면을 신학적으로는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이라고 구분한다. 외적 소명이란, 사람들이 전도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육체의 한 부분인 귀로 듣거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전체 혹은 일부를 눈으로 보고 읽으면서 듣게 되는 하나님의 부름을 말한다. 소경인 경우에는 귀나 손을 이용하여야 할 것이므로, 이 부름은 한 마디로 육체의 오관의 기능을 통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부름을 전도자의 입술을 통해서, 혹은 라디오, 티비, 인터넷 상에 있는 전도자들의 글들, 성경 말씀,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듣게 된다. 이 측면에서만 이야기한다고 하면,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날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처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육체의 오관을 통하여 들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귀로, 눈으로, 손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그 하나님의 부름에 “예”로 응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그 부름을 거부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과 관계 없이 사는 사람들도 있다. 육체의 오관을 통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어떻게 어떤 사람들은 바로 구원에 이르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며, 어떤 사람들은 죽게 되어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가? 이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따라 나타나는 내적 소명이다.

내적 소명이란, 사람들이 오관의 기능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을 때, 성령께서 성령의 감동과 신비한 능력의 역사를 통하여, 그 사람이 마음으로, 전인격적으로, 그 사람의 지, 정, 의를 총동원하여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받아드리도록 만들어 주시는 영적 역사이다. 종종 사람들이 겉사람의 오관의 기능을 속사람에게도 적용하여 마음의 눈, 마음의 귀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말하자면, 내적 소명이란 사람이 육체의 귀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때,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의 귀도 열어 주셔서 부르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만들어 주시는 영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뜻이다.

이런 들음의 차이를 쉽게 예로 들을 수 있는 사건이 사도행전 16장에 나온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이었던 빌립보에 왔을 때 기도처소를 찾다가 강가에 있는 여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 이 장면을 놓고 보면, 거기에 있었던 여인들이 몇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몸의 귀로는 그 여인들 모두가 바울 사도를 통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마음의 귀를 열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은 자주 색 옷장사 루디아라고 하는 여인 뿐이었다. 그 여인은 어떻게 마음의 귀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는가? 성경은 그 사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사도행전 16장 14절). 하나님께서 친히 그 여인의 마음 속에 역사하심으로, 똑같이 바울의 입을 통하여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그 말씀을 통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오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 마음의 귀로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하는 은혜의 역사를 나타내시는가? 성경은 이런 신비한 역사를 하나님의 택하심과 연결 시켜 설명한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유대인들은 반발하고 이방인들은 기쁨으로 그 말씀을 받아 들였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누가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장 48절).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이미 구원으로 정해진 사람들이 몸의 오관의 기능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의 심령 속에 역사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을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몸의 귀로 듣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신비하게, 친히 사람의 영혼 속에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결과다. 이 초자연적 역사가 사람의 영혼 속에 신비한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내적 소명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듣는 자의 마음 속에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여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부름이다. 한 마디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친히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의 역사이다.

건전한 신앙생활을 원하는 신자라면, 구원을 말할 때, “나”에게 일어난 변화가 과연 이런 내적 소명에서 출발한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으로 깊이 묵상해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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