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공부를 많이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던 선비가 나룻배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선비가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사공에게 물습니다. “자네 글을 지을 줄 아는가?” “모릅니다.” “그럼 공자의 가르침을 들어는 보았는가?” “아니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선비가 얼굴을 찡그리면서 다시 묻습니다. “허, 참! 인간의 도리를 모르고 사는근. 그럼, 글을 읽을 줄은 아는가?” “아니요. 저는 아주 까막눈입니다.” 선비는 놀랍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런 세상에! 그럼 자넨 도대체 왜 사는가?”

이런 대화 중에 배가 갑자기 큰 바위에 부딪혀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선비에게 이번에는 사공이 묻습니다. “선비님, 혹시 헤엄칠 줄 아십니까?” “아니, 난 헤엄을 칠 줄 모르네.” 그러자 사공이 선비에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선비님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군요.”
살아가면서 우리는 저마다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을 익힙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세상을 살 수는 없습니다. 또 자기가 가진 지식이나 기술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꼭 남의 삶까지를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것만이 유일하고 지고지선(至高至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산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신앙을 업신여기고 자기의 신앙 체험만 최고인 줄 아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성격이 각각 다르고 생긴 모습이 다르듯이 신앙의 모습도 저마다 조금씩 다르고 그 체험도 다릅니다.

더구나 은사는 저마다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보면 남의 은사를 무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식의 은사를 받아서 말씀을 잘 깨다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방언의 은사를 대단치 않게 평가합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전도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전도에 열심을 가진 사람이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소홀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다양한 은사들이 있습니다. 그런 은사들이 모두 다 존중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를 존중하며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만들어 간다면 우리 교회는 아주 훌륭한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참고로 저는 생활의 실질적인 일을 감당하는 은사는 좀 부족합니다. 그래서 집안일 하는 데는 영 소질이 없습니다. 언젠가 집에 전기에 문제가 있어서 급하게 이찬운 집사님을 불렀는데, 오셔서 5초 만에 문제를 해결하시더군요. 너무 미안하고 무안했습니다. 혹시 저와 같은 분들이 있다면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사모해야 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은사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사랑의 은사가 넘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