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비하면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사실 성탄주일이나 부활주일은 모르고 지나는 성도가 별로 없지만, 성경강림주일은 모르고 지나가는 성도가 많고, 때론 그런 주일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성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님의 오심을 기념하면서 지키는 주일입니다. (구약의 절기로는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 해서 유월절로부터 7주일 이후입니다.)

성경은 성령님께서 오신 그날에 있었던 사건 두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하나는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임함으로 인해서 나타난 현상에 대한 묘사이고 (2:1-13), 다른 하나는 마치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제자들을 비웃는 사람들을 향해서 베드로가 행한 설교입니다. (2:14-42)

앞부분에 기술한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을 때 나타난 현상의 하이라이트는 소위 방언이라는 것으로, 그 당시 칠칠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러 지방의 사람들이 다들 자기들의 언어로 제자들이 하는 “하나님의 큰 일을” (11절) 이야기하는 방언을 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보고되고 있습니다.)

혹 성령님께서 오신 사건에서 현상적인 면에 집착하면,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다 방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쉽습니다. 또는 거기서 더 나가서, 방언을 하지 못하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방언은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혹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꼭 방언이 터진다고 주장한다면, 그 방언은 꼭 다른 나라의 언어로 하는 방언이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많이 목격하는 방언은 언어를 통한 방언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의 약속대로 임하신 그 날의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부분은, 앞부분의 현상적인 부분이 아니라 뒷부분인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그날 설교한 베드로라고 하는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 불과 7주 전만해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맹세하고 저주하고 부인하였습니다. (마태 26:7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날, 두려움에 떨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집안 깊숙이 숨었습니다. (요한 20장)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로마 정권을 몰아내고 옛 다윗 나라의 영광을 재현할 것으로 굳게 믿고 따라다니다가 결국 예수의 죽음으로 끝장나자, 이제는 더 이상 미련 없이 옛 삶으로 돌아가겠다고, 갈릴리 바다에 가서 물고기나 잡겠다고 하면서 배를 다시 탔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요한 21장)

그랬던 베드로가 그날, 성령님께서 임하신 그날, 성령에 취해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던 베드로가 –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행한 설교가 사도행전 2장 후반부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반드시 질문해야 합니다.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기어들어가 숨어버렸던 그 인간이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당당하게 확신을 가지고 예수를 증거할 수 있었는지, 우리는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날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핵심은 - 제 생각으로는 – 36절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 당시 주님(퀴리오스)이라는 말은 황제에게 쓰였던 호칭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라는 호칭을, 예수 그리스도, 이스라엘이 십자가에 못박은 그 사람에게 당당하게 붙입니다. 달리 말하면, 로마의 황제가 내 주님이 아니요, 저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러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주님이시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에게도 허락된 바로 그 생명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그 생명으로 “깨어난” 당당한 베드로를 봅니다. 베드로에게서 발견하는 그 담대한 모습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 성령님 때문에, 이 성령님을 의지하기에, 이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당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안에 계셨던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도 계시고, 그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셨던 바로 그 성령님이십니다. 그 성령님으로 인해 로마 황제 앞에서조차 당당할 수 있었던 사람들 – 바로 우리들입니다.